“얌전히 있어. 안 그러면! 알지?”
백이는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고 남자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내 보따리 들고 도망쳤던 게 당신 맞지?”
“응, 나야. 다시 만나서 엄청 반가워! 그때 계획대로 됐으면 이렇게 다시 볼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지. 먼저 와서 니들 맞을 준비 하느라 나, 엄청 힘들었다고. 거기 있는 니들 가방, 내가 볼 수 있게 이쪽 테이블 위에 올려놔!”
바닥에 내려놨던 가방을 주워 들고 백이와 남자가 서 있는 쪽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가 그 위에 가만히 내려놨다.
“책을 원하는 거면 가져가. 내 가방에 있으니까.”
내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책? 그 낡아빠진 종이 뭉치가 이제 무슨 소용이 있다고…. 너나 실컷 가져. 가방을 열어! 천천히!”
책이 필요 없다고? 그럼 뭐지? 혹시 삼재? 이게 어떻게 찾은 보물인데. 마지막 청동검만 찾아내면 골동품 좋아하는 사장님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돈을 준다고 했는데, 그걸 가져가겠다고? 호락호락 내줄 수 없어. 절대로. 최대한 천천히 가방을 열면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여기 올 줄은 어떻게 안 거야? 위치추적 뭐 그런 거 한 거야?”
남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위치추적? 아이고 착각도 정도가 있지. 위치추적하고 도청하고 뭐 그런 게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는 알아? 하여튼 스파이 영화들이 멍청한 애들 다 버려놓는다니까. 여기 어떻게 찾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너 진짜 눈치 없구나.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자가 여전히 칼을 백이의 목에 댄 채 연극배우처럼 말했다.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바로 당신이, 바로 당신이!
“이제 알겠어? 네가 가르쳐줬잖아. 친절하고 자세하게.”
다리에 힘이 풀려 나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당황해 무너지는 나를 보며 남자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간도 아끼고, 일도 좀 도와주고, 물건도 직접 챙기고 그러려고 먼저 와있었지. 이것도 생각만큼 만만치 않더라고. 그런데 전혀 눈치를 못 챈 거야? 이거 정말 실망인데…. 명색이 마지막 왕검이 말이야… 크큭.”
두려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백이가 남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왕, 아니 형님!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직접 알려줬다니요? 물건을 챙긴다니요?”
놀라고 당황스러운 것만도 벅찬데 이제 수치심까지 몰려들었다. 도저히 백이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백아, 풍백!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남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과 백이의 뒤통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 참. 얘한테는 말 안 했다 그랬지?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눈치도 없이 다 까발려버렸으니. 잘 들어봐. 너네 형, 아니 왕검이지? 아무튼 쟤가 삼재를 나한테 팔기로 했거든. 돈만 많이 받으면 된다면서. 너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먹고 자는데 쓴 돈도 다 내가 준거야. 그것도 몰랐지? 부족하지는 않았지? 내가 항상 넉넉히 줬는데. 그래도 너한테는 말 안 한 거 보니 삼재를 파는 게 쪽팔린 일이라는 걸 알긴 알았나 보네. 아이고 내가 또 주제넘게 나불댔나? 다시 한번 미안. 크크큭.”
남자가 겨눈 칼날 밑에서 백이가 절규했다.
“형, 아니 왕검님! 이거 거짓말이죠? 그렇죠? 아니죠? 아니라고 말 좀 해봐요!”
막다른 골목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웅덩이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미안… 미안하다….”
백이의 절규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주먹만 한 돌덩이가 되어 날아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새로운 세상 연다고 했잖아! 나 같은 못난이도 주눅 들지 않고 살게 해 준다고 했잖아? 내가 믿었잖아! 그런데 왜? 왜?”
남자가 비열한 목소리로 흥분한 백이를 위협했다.
“워, 워. 진정해, 진정하라고. 너네 둘 문제는 나중에 알아서 해결해. 지금은 청동검을 찾는 게 먼저니까. 알았어? 자, 우리 왕검님! 이제 청동검을 찾으셔야지? 응?”
이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청동검을 찾아서 저 남자에게 넘겨주는 것 밖에 없다.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여기 있던 사람은… 어떻게 됐어?”
남자는 여전히 차가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2층에 있지. 아주 조용히. 뭘 물어도, 겁줘도, 때려도 아는 게 없는 건지 말 안 하는 건지 끈질기게 버티더라고. 너희들 올 때까지 감시하는 것도 귀찮고 힘들고 신경 쓰이고 그래서 샥~!”
남자가 백이의 목에 대고 있던 칼을 옆으로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놀란 백이가 움찔했다. 남자가 여전히 웃으며 백이의 목에 칼을 더 가까이 대고 지그시 눌렀다. 칼날이 닿은 백이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얘도 언제 귀찮아질지 몰라. 그러니까 서둘러. 우선! 니 가방에서 꺼낸 거 테이블에 올려놔. 그리고 당장 청동검 찾아와!”
시키는 대로 가방에서 꺼낸 방울과 청동거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네가 죽인 그 사람이 보관자야. 보관자가 죽어서… 청동검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나도 몰라.”
남자가 또 한 번 차갑게 웃었다. 웃음 속에 장난기와 살기가 함께 들어 있었다.
“아, 그러셔? 노인네가 죽어서 모르셔? 장난하고 있네…. 내가 생각나게 해 줄까? 응?”
남자의 칼이 백이의 목으로 다시 바싹 조여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백이의 목으로 조여들던 칼날이 멈췄다.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었다.
“거봐, 생각났지?”
이제 어쩌지? 보관자는 도대체 어디에 칼을 숨겨놨을까? 방울은 신당 탁자 위에 있었고, 청동거울은 가게 뒤쪽 방에 있었지…. 그러면 혹시 여기에도? 그럼 먼저 칼을 숨겨놨을 만한 장소부터 찾아야겠지? 우선 방부터 둘러보자.
“방을 찾아야 돼.”
“방?”
남자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진짜 하고 가짜를 늘어놓은 방 같은 게 있을 거야. 그 방에 들어가서 진짜 보물을 가져갈 만한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는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고.”
남자가 백이의 목에 대고 있던 칼날을 거둬 내쪽으로 겨누며 말했다.
“방? 시험? 하아, 이건 또 뭔 동화 같은 얘기야.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러지 마. 더 이상 귀찮아지는 거 딱 질색이거든. 일단, 가까이 와서 이 자식부터 묶어! 천천히 와! 천천히!”
남자가 발치에 있던 노끈 뭉치를 툭 차서 내 앞으로 굴렸다. 시키는 대로 백이를 의자에 꽁꽁 묶고 양말을 벗겨 재갈까지 물렸다. 공포에 질린 백이가 끙끙거렸다. 눈짓으로 걱정 말라고 했지만 백이는 내 시선을 피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던 방울과 청동거울을 제가 매고 있던 가방에 옮겨 담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나를 향해 칼을 까딱거렸다.
“자, 그럼 찾아보실까?”
남자가 칼을 겨눈 채로 내 뒤를 따랐다. 식당으로 쓰는 1층은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살림집으로 쓰는 2층이 칼을 숨기기에는 더 좋은 장소 일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려면 밖으로 나가 현관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현관 쪽으로 다가서자 남자가 칼 끝으로 등을 찔렀다.
“뭐 하시나?”
“2층이 살림집이니 아무래도 거기 숨겨놨을 것 같아서…”
“딴생각하면 진짜 큰일 난다. 가!”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2층 계단을 올랐다. 집 앞 골목은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가끔 멀리서 자동차가 달려가는 소리만 들렸다. 남자는 바로 뒤에 바싹 붙어서 칼날을 보이지 않게 내 옆구리에 들이댄 채 따라오고 있었다. 남자가 내 등에 칼을 겨눈 채 열쇠 꾸러미를 내 코 앞에 내밀었다. 2층 현관문을 열었다. 2층 거실에는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처음 맡아보는 역한 냄새에 심한 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거실로 연결된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봤다. 두 개의 방과 하나의 화장실. 방울이나 청동거울 때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찾았어?”
똑같이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린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시 1층으로? 정말 정말 번거롭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뒤 따라 나온 남자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휴, 정말이지 이 냄새는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자 그럼 다시 내려가보실까?”
심호흡을 하던 남자가 내 등을 칼 끝으로 콕콕 찔렀다.
“아, 맞다 저거!”
계단에 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2층 현관문 쪽으로 다급하게 몸을 휙 돌렸다.
“뭐, 뭐야!”
남자도 놀라 덩달아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나를 겨누던 칼날이 방향을 잃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칼을 쥔 사내의 손목을 덥석 잡아 힘껏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사내가 난간을 잡고 버티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그대로 계단을 굴러 내려가 1층 바닥에 처박혔다. 그런 임기응변이 어떻게 나왔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사내는 정신을 잃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서둘러야 했다. 계단을 뛰어내려 가 사내가 매고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사내가 들고 있던 칼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칼을 집어 들고 1층 현관문을 열었다. 백이가 칼을 들고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고 온몸을 비틀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재빨리 다가가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노끈을 칼로 잘라냈다. 백이가 입에 물린 양말을 뱉어내며 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백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다.
“얼른 일어서, 가자!”
흐느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던 백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로 주저앉았다.
“저기, 저기!”
뒤를 돌아보니 현관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눈은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 덕분에 훨씬 더 공포스럽게 보였다.
“내가 말했지, 더 이상 귀찮아지는 거 딱 질색이라고… 그거 얌전히 이리 내!”
달아날 길은 현관문 밖에 없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밀치고 그쪽으로 나가야 한다. 칼을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오 이것들이 진짜! 가방이랑 손에 들고 있는 칼 이리 내라고!”
“이, 이, 개새끼야!”
백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제가 묶여 있던 의자를 남자에게 집어던졌다. 남자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백이가 던진 의자는 남자의 팔에 맞고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백이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의자에 맞은 충격으로 잠시 머뭇거렸던 남자가 우리 둘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니들…, 진짜 죽었어…!”
백이와 나는 닥치는 대로 근처에 있는 의자를 집어 남자에게 던졌다. 남자는 날쌔게 의자들을 피하며 순식간에 백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의자를 던져? 나한테? 넌, 씨… 곱게 안 죽여!”
남자의 주먹이 백이의 배를 강타 냈다. 백이는 헉 소리도 못 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남자의 팔꿈치가 백이의 등에 꽂혔다. 앞으로 굽어가던 백이의 상체가 휙 하고 들렸다. 남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백이의 얼굴에 하이킥을 날렸다. 남자의 킥을 정통으로 맞은 백이가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굴렀다.
“걔한테 손대지 마!”
바닥에 쓰러진 백이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남자를 향해 칼을 앞세우고 온몸을 날렸다. 남자는 달려오는 나를 힐끗 보고는 슬쩍 한 걸음 옆으로 피해버렸다. 찌를 대상을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옆에 있는 테이블을 들이받고 바닥에 뒹굴었다. 들고 있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청동검 찾을 수 있을 만큼만 죽여야 되는데, 내가 지금, 그게 잘 될까 모르겠다!”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와 배를 걷어찼다. 숨이 막히고 눈앞이 가물거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남자의 발이 또 날아들었다. 옆구리, 머리, 등 할 것 없이 욕설과 함께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발길질을 멈춘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하… 정신 차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남자는 내가 떨어뜨린 칼을 집어 들고 있었다.
“칼로 찔러도 아프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데가 있거든… 어디냐면 말이야…”
칼날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바닥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머리털이 온통 뽑혀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남자의 단단한 팔뚝이 내 몸을 카운터 쪽으로 힘껏 밀쳤다. 달아날 길이 없었다. 카운터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버티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거 없어. 찔리면 그냥 다 죽는 거야!”
내 배를 겨눈 사내의 칼이 번뜩였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몸통을 때리는 뭉툭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곧 지독한 아픔이 시작되겠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떴다. 눈앞에 백이의 뒤통수가 있었다. 남자의 짜증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아우! 이게 끝까지 지랄이네 지랄!”
사내의 칼이 백이의 배에 박혀있었다. 백이의 몸이 스르르 바닥에 쓰러졌다.
“혀, 형님…, 아…, 아파요…”
나와 눈이 마주친 백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야! 너! 왜 그랬어! 왜!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된다고!”
백이를 끌어안고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별 볼 일 없던 인생에서 나를 믿고 의지했던 사람. 내 비밀을 알고 이해해 줬던 사람. 나와 함께 위험을 감수하고 걸어가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밥이랑 간식 많이 먹어도 뭐라고 안 할게. 늦잠 자도 잔소리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만 마!”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이의 입에서 역류한 피가 흘러나왔다. 백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 형님… 믿어요. 그… 러니까… 형님도 … 헉헉, 형님 믿어요. 꼭….”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쫌!”
덕이의 머리를 감싸 안고 울부짖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자는 몇 걸음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못난이들… 사는 세상… 쿨럭… 꼭… 열어… 삼재… 꼭… 약속… 와, 와, 왕검….”
말을 다 마치지 못한 백이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벌어진 내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주먹만 한 눈물이 턱을 타고 덕이의 얼굴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완전 감동의 도가니탕이네! 눈 뜨고 못 봐주겠어! 나 완전 열받았거든. 그래서 내가 생각을 바꿨어. 너, 얘랑 손 잡고 같이 가게 해 줄게. 지루하지 않겠다, 그렇지?”
남자가 백이의 배에 꽂힌 칼을 빼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인터폰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창가로 달려가 밖을 살폈다.
“아, 씨… 결국 이렇게 귀찮아진다니까… “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경찰입니다. 신고받고 왔어요. 아무도 안 계세요?”
집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이번에는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창 밖을 지켜보던 남자가 혼잣말을 했다.
“어쩐다… 아직 청동검을 못 찾았으니….”
남자의 발이 걸어와 내 앞에 멈춰 섰다.
“방울 하고 청동거울, 그리고 책들은 모두 내가 가져간다. 빈 손으로 갈 순 없잖아. 그치?”
백이를 끌어안은 채 힘겹게 고개만 들어 남자를 노려봤다.
“가져가봐야 소용없어. 내가 없으면.”
내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 그거? 아휴, 걱정하지 마. 나도 되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남자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못 알아들었어? 나도 너랑 같다고. 나도 후손이라고. 우리 6촌이라고. 내 진짜 이름은 ‘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