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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Oct 12. 2024

세 번째 보물 ‘칼’, 그리고 기꺼이 해야 할 일

말을 마친 남자가 백이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제 얼굴과 몸에 발랐다. 머리를 헝클고 옷도 여기저기를 잡아 뜯었다. 현관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남자는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문을 열어젖혔다. 경찰 두 명이 뛰어들어왔다. 남자는 더욱 소리를 지르고 호들갑을 떨며 집안을 가리켰다. 피칠갑을 한 남자의 모양새를 본 경찰 한 사람이 가스총을 뽑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남은 경찰이 남자를 진정시켰다. 그 순간 남자가 경찰의 뒷덜미를 손 날로 내리쳤다. 경찰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자는 경찰의 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키를 꺼냈다. 그리고는 유유히 대문을 지나 골목으로 사라졌다.

백이의 주검을 끌어안고 있던 나는 현장에서 체포됐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공짜 음식을 준다는 말에 혹해 식당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한 관광객으로 밝혀져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경찰은 여러 가지 정황상 경찰차를 탈취해 달아난 남자가 횟집 사장인 노인도 죽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남자가 타고 달아난 경찰차는 사건 현장에서 멀지 않은 해안도로에서 발견됐다. 차에도 남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2층에 방치되어 있던 노인의 시신은 해외여행 중 연락을 받고 달려온 딸이 서럽게 울며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피해자 조사 때문에 미뤄졌던 백이의 장례는 수사가 마무리된 후 시신을 돌려받아 내 손으로 조용하게 치렀다. 모든 것이 일단락 됐다. 삼재의 마지막 보물인 청동검을 찾지 못했고, 약속했던 돈도 받지 못했고, 친구이자 동생이었던 백이가 저 세상으로 떠난 것만 빼고.
백이의 유골함을 안고 제주 공항 로비에 들어섰을 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렸다. 지은 씨였다. 그 남자, ‘탐’에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횟집 노인의 딸.

“네, 지은 씨. 어쩐 일이세요?”
“저 지금 공항에 도착했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 남았죠?”

1층 커피숍에 마주 앉은 지은 씨는 아무 말도 없이 머그잔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지은 씨가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가져가세요. 자격 있어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지은 씨… 무슨 말씀인지…”

지은 씨는 아무 말 없이 종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 안에는 신문지에 싸인 얇고 길쭉한 뭔가가 들어 있었다. 꺼내서 신문지를 풀었다. 세상에! 백이를 찔렀던 그 회칼이었다. 놀라서 다시 신문지에 감아 쇼핑백에 넣어버렸다.

“이게, 이게 무슨… 그리고 이걸 어떻게? 설마, 설마… 지은 씨… 경찰서에서 훔쳤어요?”

지은 씨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닌가? 그럼 뭐지? 그럴 리가..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보…관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지은 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희생. 적을 제압하는 힘의 원천이에요. 서로를 믿지 못하면 아무리 큰 힘이 있어도 절대 적을 이길 수 없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은 씨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청동검은 다른 보물들처럼 자격을 시험하지 않아요. 알아서 증명해야 하죠. 두 분이 그걸 해낸 거예요. 보관자인 저도 없이. 풍백씨, 왕검님 대신 청동검에 찔렸잖아요.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희생한 거죠. 청동검이 그 희생을 보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한 거예요. 이제야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제 짐을 덜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을 마친 지은 씨가 의자에 앉은 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지은 씨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분명…”

마지막 보물을 찾았다는 기쁨보다, 아버지를 잃은 지은 씨의 슬픔이 더 크게 밀려와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도 풍백의 얼굴과 엄청난 비밀을 일방적으로 털어놓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풍백이 살아 있었다면 드디어 보물을 다 찾아냈다고,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호들갑을 떨며 펄쩍펄쩍 뛰었을 텐데. 아버지도 지금 내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기뻐하고 계실까? 잘 모르겠다. 아버지와 풍백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도움을 주고받았던 탓에 그 남자, ‘탐’과의 일을 대강 알고 있던 지은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중고거래 어플을 켰다. 채팅창은 아직 살아 있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자판을 눌렀다.

‘청동검 확보. 거래 마무리 짓죠?’

기다렸다는 듯 답 메시지가 올라왔다.

‘사흘 후, 오후 4시.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청동검 가지고. 혼자 와. 보고 싶다.’

어플을 닫고 스마트폰 화면을 꺼 탁자에 내려놨다.

“끝을 내야죠.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의자에 앉은 채 내 쪽으로 얼굴을 쭉 내민 지은 씨가 목소리를 낮춰 엄숙하게 말했다.

“풍백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제가 함께 할게요.”

지은 씨와 함께 커피숍을 나오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잃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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