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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비 Oct 05. 2024

당신! 당신은!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성냥갑처럼 보이던 건물과 차들이 서서히 제 크기를 찾고 있었다. 귀가 먹먹했다. 꿀꺽 침을 삼켰다. 옆 자리에 앉은 백이가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팔걸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쿠궁하는 진동과 함께 비행기가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바닥에 끌리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비행기가 멈춰 섰다. 계단 트랩이 다가왔다. 비행기 문이 열리자 짠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국적인 야자수와 화창한 날씨, 형형색색의 옷과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자동차들. 제주 공항의 모습은 별천지였다.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배가 고팠다. 백이가 검색한 공항 근처 식당에서 푸짐한 고기국수와 수육을 배불리 먹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이라 그런지 터미널은 한산했다. 표를 끊고 애월 가는 버스를 탔다. 도심을 벗어나자 버스의 오른쪽 창문 밖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그건 백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무슨 해수욕장이었지?”

차장 밖 풍경에 넋을 잃은 백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거기 해수욕장 이름이 뭐였냐고!”

다시 한번 묻자 백이는 차창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에? 곽지, 곽지해수욕장이요.”
“곽지? 이름 특이하네.”
“효리네 해수욕장이잖아요.”
“왜?”
“가수 이효리가 제주 살 때 거기서 자주 놀았대잖아요. 그래서…, 우리 왕… 아니 형님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서 어쩐대요. 새로 열려고 해도 뭘 알아야….”
“야, 말조심!”

다급하게 백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낮 시간이라 주변에는 다른 승객들이 없었다. 입은 틀어막았지만 백이의 마음과 눈은 창 밖에 펼쳐진 바다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터미널을 출발한 지 50여분 만에 곽지과물해변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백이가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켜 주소를 검색했다.

“이쪽이에요!”

이정표를 따라 곽지해수욕장 쪽으로 들어섰다. 아담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백사장 뒤로 연수원, 펜션, 식당, 편의점, 호텔이 죽 늘어서 있었다. 본격적인 휴가철 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우리가 찾는 집는 해수욕장 끝 커다란 빵공장 너머의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현무암으로 담장을 두르고 겉만 리모델링 한 2층 집이었다. 대문에는 ‘홍 해물식당'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오호… 이번에는 횟집이에요.”

백이가 환호했다.

“그러게, 벌써부터 걱정된다. 여긴 뭐가 있을지…”
“그러니까요, 이번엔 먹는 집이잖아요. 회 실컷 먹을 수 있겠죠? 일 마치고 나면?”

백이 저 녀석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 삼재인 청동검만 찾고 나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식당 문은 닫혀 있었다. 아니면 아직 안 연 걸까? 정기 휴일인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백이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식당이나 펜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었다. 한 시간쯤 마을을 구경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왕검님, 배고파요. 우리 뭐 좀 먹고 다시 와요.”

빵공장을 지나 곽지해수욕장으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앉아 회 한 접시와 소주를 시켰다. 제주의 회와 소주는 달았다. 매운탕까지 싹싹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낮 술의 취기와 바닷바람, 따사로운 햇살에 홀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백사장에 앉아 있었다. 초저녁의 어스름이 밤의 어둠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번 더 찾아갔지만 식당은 여전히 문이 잠겨 있고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문을 안 연 것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중고거래 어플 채팅 창에서 비행기 티켓 정보 아래 있는 펜션 주소를 찾았다. 찾아가 보니 낮에 마을 구경하며 지나친 펜션이었다. 깔끔하고 편안했다. 개운하게 씻고 폭신폭신한 침대에 누우니 절로 잠이 쏟아졌다.

“매일매일 오늘 같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먹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근심 걱정 없이 맘 편안하게 한숨 푹 잘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지. 백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비행기 티켓과 펜션 주소를 보낸 이후 채팅 창에는 아무런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마지막 메시지가 여전히 불편하고 찝찝해서 나도 선뜻 메시지를 보내기가 꺼려졌다. 메시지는 없지만 그 사람도 분명 이곳에 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만나면 정체를 알 수 있겠지. 달콤한 잠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밀려들었다.
이곳에 온 지 오늘로 사흘째. 여전히 그 식당은 굳게 닫혀 있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 집이 맞았다. 청동검 보관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을 마치지 못한 채 보내는 하루하루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일주일치 요금이 지불된 펜션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마냥 이대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현무암으로 쌓은 담을 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쓰는 1층 현관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당을 향해 난 창문도 기웃거려 봤지만 텅 빈 테이블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듯한 2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골목에서 망을 보던 백이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누가 와요!”

구르다시피 2층에서 내려와 담장을 넘어 집 밖으로 나왔다. 모퉁이를 돌아 대문이 있는 쪽으로 나오니 젊은 남자 한 명이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니 관광객은 아닌 것 같았다.

“아유, 날씨가 참 좋네. 그렇지?”
“그러게요. 미세먼지도 없고 공기도 좋아요.”

사내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저, 그 뭐더라, 이, 이 집 회가 그렇게 맛있다며?”
“아 그래요? 무, 무슨 회인데요?”
“그 뭐냐, 그렇지 과, 광어!”
“아유 먹고 싶어라. 근데 아직 문을 안 열었나 봐요. 이따가 다시 와요.”

스마트폰 TTS만도 못한, 누가 봐도 수상하고 어색한 대화였다. 사내는 홍 해물식당 대문 앞에 멈춰 서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혹시 저 남자가 청동검 보관자?

“저기… 회 들러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남자의 질문에 거짓말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했다.

“네? 네, 저, 회, 그렇죠. 회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회는 어제, 그젠가? 먹었잖아. 그렇지?”

더벅머리는 횡설수설하는 나를 외면하며 딴청을 부렸다. 치사한 자식, 이럴 때 도와줘야지 모른 척 해?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얼굴 가득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혹시 어제, 그제도 오셨어요? 급한 볼일로 사장님이 육지에 가셔서 가게를 못 열었어요. 사장님 안 계시면 장사를 할 수가 없거든요. 장사는 안 해도 이것저것 챙겨야 할게 많아서 한 번씩 들여다봐야 해요. 저요? 저는 사장님께 일 배우는 부 주방장이에요. 제주도에 근사한 식당 하나 열려고 준비 중이죠. 근데 요즘에는 관광객도 줄고, 식당도 많이 생겨서 고민이에요. 가게가 무지막지하게 크던가, 말도 못 하게 근사하던가, 음식이 독특하던가, 풍경이 죽여주든가 뭔가 특별한 구석이 없으면 파리만 날리다가 끝이더라고요. 그래도 음식이 맛있으면….”

남자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제 흥에 겨워 줄줄줄 쏟아냈다. 덕분에 나와 백이의 어색한 발연기가 자연스럽게 묻혀버렸다.

“아이고, 제가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놨네요. 아무튼 사장님은 오늘 저녁에 오시니까 저녁에 꼭 다시 들러주세요. 두 분 얼굴 기억했다가 서비스 꼭 드릴게요. 단골들한테만 드리는 건데요, 그게 뭐냐면…”

남자가 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는 시늉을 하면서 백이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이 남자 어때 보여?’

덕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였다. 청동검 보관자일 리 없다는 뜻이다. 오래간만에 일백 프로 동감이다.

“아냐 아냐, 일부러 찾아오셨는데 이러면 안 되지. 안으로 들어가실래요? 아직 좀 어설프지만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 좀 발휘해 보지요 뭐. 활어는 저녁에 들어와서 회는 안 되겠지만 찌개나 탕은 충분히 가능하니까. 에이 괜찮아요. 자자, 들어가요, 들어가! 왜요? 돈 내라고 할까 봐? 안 받을 게요! 공짜예요.”

흥이 넘친 남자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며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끌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어어 하는 사이 신발을 벗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며칠 동안 문을 열지 않은 탓이려니 생각했다. 남자는 여전히 호들갑을 떨며 한참을 벽을 더듬다가 간신히 스위치를 찾아내 실내등을 켰다. 그 모습이 영 어설펐다. 남자가 식당 가운데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남자가 권한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다. 남자는 물병과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길 잃은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주방 입구를 찾아내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저녁에 온다는 사장이 보관자겠죠?”

백이가 주방 쪽을 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럴 것 같아.”

나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저 남자 좀 이상하지 않아? 부 주방장이라면서 전등 스위치도 못 찾고, 주방이 어느 쪽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말이야.”

내 말에 백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가져다준 물은 미지근했고, 컵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그러게요. 전부 엉망이에요. 말은 그럴싸하더니. 왕검님, 물 먹지 마요. 배탈 나기 딱 좋겠어요.”

얼굴을 찌푸린 백이가 물이 담긴 컵을 한쪽으로 밀쳐냈다. 그때 주방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한데,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가보라고 눈짓을 하자 백이가 마지못해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창 밖 마당에는 햇살이 가득했다. 그런데 저 남자, 왜 낯설지가 않지? 어디서 봤지?

“왕, 아니 형님!”

열심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백이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백이의 목에 회칼을 대고 주방 문을 넘어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의 얼굴에 낯익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책이 든 보따리를 훔쳐 달아나던 남자의 얼굴에서 봤던 그 표정. 그 사람이다! 칠칠치 못한 놈 같으니. 잔뜩 당황해서 이렇게 중요한 걸 이제야 알아보다니.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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