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대학 졸업 직후 동기들보다 빠르게,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다고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입사 후 2년쯤 흘렀을 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마음속에 스멀거렸다. 첫 취업이 빨랐으니 지금이라도 다른 분야를 두드려보자고 생각했다. 비록 전공은 아니었지만, 첫 직장에서 맛보기로 경험한 '광고 기획'에 계속 마음이 끌렸다.
사람이 어떻게 재밌고 좋아하는 일만 하니?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일은 그냥 생계 수단일 뿐이야.
업무 강도가 높은 광고회사 입사를 만류하는 회사 선배들과 부모님의 말씀을 뒤로한 채 결국 업종을 바꿨고 인턴 생활부터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모든 게 신기했다. 마치 화면 속으로만 보았던, 꿈에 그리던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처럼 설렘 가득한 일상이 이어졌다. 늘 아이디어가 팡팡 터지는 선배들을 보며 나도 언젠간 저런 경지에 이르겠지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일을 실제로 하게 되었을 때의 벅차오름과 함께, 모든 걸 흡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종일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좋은 아이디어에 대한 압박감, 때로 나와 맞지 않는 클라이언트를 만났을 때의 스트레스, 예측할 수 없는 잦은 야근은 반짝거리던 눈을 조금씩 흐리게 만들었다.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힘들 수 있는 걸까... 사실은 나랑 맞지 않는 옷인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광고는 더 이상 '좋아하는 일'이 아닌 그냥 '일'이 되었다.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광고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는 핑계에 이런저런 핑계들을 덧붙여 그냥 여기서 멈추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또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금, 누군가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냐고 물으면 나는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스우파'>가 얼마 전 종영했다. 연일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며 화려한 막을 내린 스우파는 곧바로 시즌 2 <스트리트맨 파이터>를 예고했다. 처음에는 그저 춤추는 언니들의 기싸움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춤에 대한 그녀들의 철학과 열정에 빠져들었고 열혈 시청자가 되어 모든 크루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매주 그녀들과 함께 했다.
누군가의 백업 댄서로 그림자처럼 대우받던 그녀들이 '댄서'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단 하나. '춤을 사랑해서'였다. 대우도 열악하고 수명도 짧은 직업이지만, 좋아하는 춤을 놓지 않기 위해 틈틈이 하이힐도 팔고, 속눈썹도 팔고, 분만실 간호사가 되기도 하며 일상을 버텨냈다. 경력은 꽤 오래됐지만,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보는 게 처음이라 어색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들은 댄서라는 직업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 낯설 뿐이었다.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그녀들을 보며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행복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질 수 있고, 중요한 건 길을 잃었을 때의 나의 태도라는 것을 예전의 내가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스우파>를 통해 본 건 단지 화려한 퍼포먼스뿐 만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것을 넘어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해 보는 것, 나의 한계와 직면했을 때 도망가지 않고 그 한계를 두드려보는 것, 동료들과 진심으로 연대하고 어려움에 맞서 보는 태도들까지. 나에겐 꽤나 교훈적인 프로그램으로 기억될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또다시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그리고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누군가를 다시 만났을 때, 스우파 속 멋진 언니들을 떠올리며 다독이고 싶다.
좋아하는 일 앞에서 힘들어해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주자고.
좋아하는 일을 놓아버리지 말고
꼭 붙잡고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