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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럽작가 Sep 05. 2020

우리 데이트할까?

남편이 한 때는 나의 남자친구였지

며칠 전 아들과 대치상태에 있던 남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평소라면 그 정도 일에 그렇게 벌컥 화를 낼 사람이 아닌데. 그건 마치...이유없는 화풀이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다정하고도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볼 때에 나는 어제저녁부터 회피하고 있던 생각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정말...나 때문인가'


아이들의 훈육 방식을 두고 남편과 내가 갑론을박하던 그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 요즘 뭐 다른 데 화나는 거 있어? 집에 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면 얘기해줘.

- 그런 거 없어. 


남편은 짧게 답하고 말았다. 나는 '다른 이유'라는 말을 갖다 댔지만 실은 '나 때문이야?' 라고 묻고 싶었다. 직장에서 집에 돌아오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에 비해 당신은 왜 얼굴이 어두워보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이라는 말 자체로 즐거워지는 금요일. 자꾸만 '그런 거 없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말로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남편의 모습은 최근 확실히 다르다. 짜증이 늘었고 말투도 퉁명스러워졌다. 결혼 이후 내게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남편과 다투었을 때면 곧잘 남편은 데이트를 신청하곤 했다. 문득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꽤 오랫동안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결코 남편이 다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부부가 살아가는 데는 늘 작용과 반작용이 딱 그 만큼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남편을 바라볼 때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 남편도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다 잘하는데 남편만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를 서운하게 만든 것만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는 늘 '나는 안 그런데.' 하는 생각이 따라오지만 실은 남편도 자기가 서운한 것만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를 일이다. 


마음이 담긴 대화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데이트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앉기만 하면 할 일이 눈에 띄고 아이들을 우선으로 하게 되는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오랜만에 갖고 싶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오빠, 오늘 어른들께서 아이들 봐 주실 수 있다고 하면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까?] 메세지를 보냈다. 이내 답변이 돌아왔다. 

[네, 좋아요.]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 지난 결혼기념일에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간 게 아쉬워 밖에서 식사를 하려 한다고 말씀드렸다. 아이들을 잠시 맡아주실 수 있냐고 여쭈며. 어머님은 잘 다녀오라며 아이들을 돌봐주시겠다고 하셨다. 




각자 일을 마치고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만나 내가 남편 차로 옮겨탔다. 전 날 일 때문에 다소 어색한 기운이 돌았지만 이내 남편이 '뭐 먹을까' 하고 말하며 우리의 분위기는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먹을 만한 것을 먼저 떠올리고 거기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먹고 싶은 것을 하나씩 말해보기 시작했다. 이것 저것 음식 메뉴를 말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얼큰한 것으로 합의를 보고 소고기홍합짬뽕으로 유명한 집을 찾아갔다. 음식점에서 식사를 시작할 즈음 우리는 많이 웃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 오빠, 다 먹으면 차도 한 잔 마시자. 내가 퇴근길에 늘 보는 까페가 하나 있는데, 진짜 가보고 싶게 생겼어. 

- 그래, 그러자.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까페로 향했다. 보기에도 예뻤던 블루베리 다쿠아즈는 입에서 살살 녹았고 홍차는 소꿉놀이셋트에 있는 그것처럼 예쁜 티팟에 담겨 나왔다. 앙증맞은 잔 마저 기분이 좋았다. 



블루베리 다쿠아즈를 한 입 먹고 다시 베어먹으려는 데 남편이 입을 열었다. 


- 사실, 나 요즘에 집에 와서 별로 즐거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아. 내가 집에 왔다고 여보가 막 반겨주는 것 같지도 않고. 애들 먹을 거 위주로 저녁 먹고 나면 당신은 강의 듣는다, 글 쓴다 늘 바쁘고. 게다가 나는 아무리 할 일이 있더라도 잠은 자면서 했으면 하는데 당신은 잠을 너무 안 자. 그거 건강에 진짜 안 좋아. 내가 아무리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해도 내 말을 듣지도 않잖아. 최근 내가 늘 화나 있는 사람 처럼 보였다면 아마 그런 이유일거야. 


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유는 있다. 남편이 퇴근했을 때 반갑게 맞이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시간대가 딱 아이들 씻기고 나오는 시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인사에만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말만 던지게 되는 것이고, 듣고 싶은 강의는 너무 많다. 그 중에 고르고 골라 듣는 건데? 그것도 애들 재우고. 새벽시간은 아이들 아침 준비, 내 출근준비로 온전히 글 쓸 시간이 저녁에만 주어지는 것을 어쩌라는 말인가. '나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엄마'라서 바쁜데 당신은?' 이라고 묻고 싶었다. 


조목조목 따지자면 서운해도 내가 서운해야 했다. 하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지금 데이트 중이니까. 


- 오빠. 내가 오빠 의견도 안 들어주고 애들만 보는 것 같아서 서운했겠네. 그런데 어쨌든 내가 당신보다 출근시간이 늦고 퇴근 시간은 조금 더 빠른 이유로 아이들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잖아. 그러다보면 우리 사이가 소원해질 수도 있어. 그럴 때면 우리 와이프가 많이 바쁘구나. 아량을 좀 베풀어주면 어떨까? 그러면서 집안일이든 육아든 당신이 할 일을 찾아서 해 주면 우리 둘다 훨씬 여유가 생길거야.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나한테 서운해 질 때면 '내가 서운하면 상대도 똑같은 정도로 서운하다'고 생각하고 서로에게 아량을 베풀어주자. 


돌려말했지만 서로를 이해하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쨌든 내가 당신보다는 바빠도 더 바쁜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나는 따져묻지 않았고, 화내지 않았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남편은 조용히 듣고 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자신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실로 오랜만에 나의 마음이 상대에게 가 닿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남자친구였던 나의 남편.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우리 데이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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