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레고를 좋아했다. 동네에 있었던 레고 매장은 어릴 적 나의 놀이터였다. 어느 날 레고 매장을 기웃거린 나는 새로 출시된 관제탑 시리즈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고 레고 매장으로 향했다. 다짜고짜 매장 바닥을 뎅굴뎅굴 구르기 시작하니 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해하셨다. 슬픈 생각을 하며 눈가에 힘을 주니 눈물이 맺혔다. 이쯤이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면 아버지가 마지못해 지갑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통했다. 매장 직원은 아버지의 신용카드를 받아 압인기에 넣고 꾹 눌렀다. 카드 정보가 전표에 찍혔다. 아버지는 전표에 서명을 하셨고 직원은 카드와 함께 전표 뒷 장을 떼어 아버지께 돌려주었다. 나는 레고 상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떼쓰면 뭐든 이룰 수 있었던 그 시절. 이때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어떤 것을 떠올릴 때마다 기억에도 층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생한 기억과 애매한 기억.
생생한 기억은 공기와 같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을 것만 같다. 그 기억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절대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는 듯하다. 새로운 기억들이 들어오며 툭툭치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해도 이를 앙 다문 용비석처럼 한치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다. 맹장염에 걸려 발을 동동 구르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책을 보며 세상에 누가 맹장염에 걸리겠나 생각했던 어느 날 밤, 서서히 몰려오는 복통에 병원 수술대에 오르고 나서야 내가 그 만화의 주인공이구나라고 깨달았던 기억. 초등학교 시절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한강까지 가보자 의기투합했을 때 으슥한 곳에서 나타난 불량배들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강탈당해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세 시간 동안 흘렸던 기억. 중학교 체육시간 몇몇 친구들의 땡땡이를 봐주다가 선생님에게 혼자 꾸지람을 듣곤 했을 때 그 친구들로부터 생일 선물로 거대한 꽃다발을 선물 받은 기억. 이러한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 생생함이 한결같다. 한 번씩 떠올릴 때마다 맨질맨질하게, 더 또렷하게 손질되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눈 감는 순간까지 함께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머릿속 한 구석 어딘가에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애매한 기억들도 있다.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기 같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갈고리 하나에 육중한 무게를 의지하고 있는 덩어리 모양을 한 기억들이다. 한 번씩 손질이 될 때마다 또는 냉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절삭되고 풍화되듯 기억들도 이리저리 쓸리기 마련이다. 행여 의식 밖으로 소환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영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장환아 너 작년 가을에 대모산 둘레길 돌고 나서 먹었던 양재동 고깃집 기억나?” 이 말에 내 미간에 주름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이마 주름만으로는 그 갈고리를 찾을 수 없었기에 눈을 한 번 더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단서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본다. ‘가을... 대모산... 둘레길... 양재동... 고깃집...’ 우연히 머릿속 어딘가에 걸려있는 그 갈고리를 확인한 순간 기억은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기억의 덩어리를 이곳에서 보고 만지고 저곳에서 냄새를 맡고 더듬으며 흥분하여 떠들어 댄다. 이 순간만큼은 홍해가 갈라지듯 생생한 기억들은 양쪽으로 자리를 내어주고 애매했던 기억이 그 사이에 생긴 샛길을 따라 내게로 조심스레 걸어온다. 막 걸음을 뗀 아기가 엄마를 보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것 같다. 걷는 모습이 영 어색하고 불안해 보이지만 그저 내가 반갑다고 활짝 웃으며 달려온다. 그리고 아기는 내 품속에 꼭 안긴다. 아기의 모습을 한 애매했던 기억과의 만남에 코 끝이 찡해진다. 내 의식 밖으로 오롯이 걸어 나온 기억이 대견하고 장하다.
나를 거쳐간 모든 기억들이 생생히 남아 영원히 함께하면 좋겠다. 그러나 어느샌가 점점 사라져 버리는 기억을 모두 다 끌어안기가 벅차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쌓이는 사건이 많아질수록, 나의 경험은 생생한 기억이 되기보다는 잠깐 머릿속을 스치고 사라져 버리는 손님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더 나아가 남아있는 생생한 기억들 조차 그들을 동여매고 있던 수십 수백가닥의 동아줄이 뜯어질 때마다 그 자리가 위태로워지며 이윽고 하나의 갈고리에 의지하는 기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꼈다. 혹여나 그 단 하나의 갈고리가 끊어진다면 내가 아무리 미간에 힘을 준다 한들 결코 내 의식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존재했었던 기억인가?'라는 물음은 '내가 달에 가본 적이 있던가?'라는 물음과 매한가지다. 있었는데 사라진 기억은 앞으로 영영 떠올릴 수 없는 한 애초에 없었던 기억과 그 모양새가 같기 때문이다.
어떠한 기억은 너무나도 희미해져 나 스스로 떠올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한 기억들이 타인의 입으로 그려지며 각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때면 서글프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노화에 대해, 뇌과학에 대해, 기억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의도적으로 하루 일을 철저히 탈색시켜 버리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유익할지도 모를 그러한 담론들 역시 내 머릿속 어딘가에 갈고리를 걸고 안착하기 전에 민들레씨처럼 흩날려 버린다. 그리고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린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다행(多幸)이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린 기억 앞에서 더 이상 서글퍼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은 나를 이루는 조각이자 내가 기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갈고리가 끊어져 의식 밖으로 영영 사라진 기억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한때 내 안에서 숨 쉬며 나를 만들어갔던 시간만은 부정할 수 없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잃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기억들이 만들어낸 지금의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라진 기억들을 애도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갈고리를 걸고 있는 기억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감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