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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열전

by 샤토디

- 잠깐 번쩍한다더라고

- 뭐가?

- 그냥 잠깐 번쩍하고 보통을 그걸로 끝 이래


제니는 궁금했다. 번쩍하고 눈떠보면 다 끝. 아니 눈은 못 뜰까나. 태어났을 때에는 한겨울이었는데 이제 여름이다. 처음엔 젖을 물려면 고개를 쭉 빼들어야 했는데 이젠 기억도 안나는 엄마랑 키가 비슷해졌을 것이다.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엄마도 번쩍하고 사라졌을까.


밥통에 밥을 넣어주는 인간이 있다. 그에게 물어봤다. 저기요. 번쩍하고 그다음은 뭐예요? 전 죽는 건가요? 인간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내가 꼬치꼬치 캐물으면 막대기로 코를 쿡쿡 찌르며 조용히 하라고 한다. 정말 덜떨어진 인간이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게 자랑인가?


어제 바키는 인간의 손에 끌려 집 밖으로 끌려나갔다. 처음 인간이 목에 거는 올가미를 가져왔을 때 영리한 바키는 돈생이 절단날 수 있는 위기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아챘다. 인간을 피해 집 주위를 돌았다. 바키는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42? 43킬로미터? 우습다. 이 집만 나가면 100킬로미터는 주파할 수 있다.


-이 돼지새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도망 다녀


슬슬 약이 오른 인간이 올가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끝이 뭉툭한 긴 몽둥이를 들고 전력을 다해 바키를 쫓기 시작했다. 공격반경이 넓어졌기에 아무리 발이 빠른 바키라도 피하기 어려웠다. 몽둥이가 긴 타원을 그리더니 바키의 뒷다리를 내려쳤다. 인간은 바키에게 흠집이 날까 걱정하면서도 바닥에 뎅굴뎅굴 구르며 울부짖는 바키의 목에 올가미를 단단히 걸었다. 바키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니는 멀리서 바키를 바라보며 밥통에 얼굴을 처넣었다. 인간이 다가올까 전전긍긍하며 말 잘 듣는 척하기 위해 밥통을 싹싹 긁었다. 곁눈질로 경계하며 모르쇠 하던 중 바키와 눈이 마주쳤다.


- 도와줘 제니 우리 힘을 합치면 살 수 있어!


제니는 못들 은척하고 밥통에 얼굴을 깊게 처넣었다. 이미 밥은 다 먹고 없었다. 바키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미안 바키 내가 인간을 들이받으면 이젠 내 차례가 될 거야. 최대한 순한 척 착한척하며 인간의 마음에 드는 척을 해야 한다. 토실토실하게 몸을 가다듬으면 종자돼지가 될 수 있을까? 그러기엔 나는 유진이에 비해 너무 날씬하다. 유진이는 인간들이 감탄할 정도로 토실토실하다. 유진이가 맛있을 것 같아서? 설마 유진이가 이뻐서? 유진이가 자기와 닮은 토실토실한 돼지들을 많이 낳을 것 같아서? 돈이 되니까? 완패. 유진이는 너무 뚱뚱해서 내가 이길 수 없다. 왜 나를 이렇게 낳았나요 엄마. 철컹하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키는 인간의 손에 끌려나가는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살려줘 도와줘 제니 가고 싶지 않아. 바키가 말할 때마다 인간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때렸다. 돼지새끼 조용히 해. 제니도 눈물이 났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바키는 제니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너랑 결혼해서 이곳을 내 자식들로 가득 채울 거라고. 이름은 잭, 스콜스, 푸링, 지니로 지을 거라고. 다섯째 이름은 뭐야? 그건 잘 모르겠어. 제니는 푸링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세 번째 아이는 꼭 푸링이라고 지어야지. 바키는 철창 밖에서 제니를 향해 노래를 불렀다. 널 사랑해. 영원히 널 사랑해. 바키는 몰랐다. 그젯밤의 세레나데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바키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아직까지 목소리가 폐를 뚫고 지나는 것 같다. 숨 쉬기 힘들다.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울다 지쳐 잠들었다.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뚜벅뚜벅. 인간은 오늘도 올가미를 들고 있다.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러나 발버둥 칠 새도 없이 올가미가 제니의 목을 졸라맸다. 숨 쉬기 힘들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 인간은 씩씩대며 제니의 코를 강타했다. 너무 아팠다. 코피가 나는 건가? 아프다. 바키도 아팠겠다. 제니는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인간은 몽둥이로 제니의 머리를 후려쳤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눈을 떠보니 친구들이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나도 저렇게 죽는 건가? 피가 섞인 콧물이 났고 눈물과 오줌이 멈추지 않았다. 엄마. 바키. 유라. 유진. 진주. 정민. 프랜시스… 모든 가족들이 생각났다. 이제 깨달았다. 번쩍하면 죽는 거구나. 죽는 건 뭐지. 엄마 젖이 그립다. 엄마가 서 있으면 숨어있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늘이 없다. 엄마도 번쩍했어? 엄마 나 좀 가려줘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았다. 얼굴을 한 인간들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저기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저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에요. 제니는 소리쳤지만 답이 없었다. 열만 세게 해 주세요. 조금만요. 그러나 인간은 막대기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허공에 취직하는 소리가 났다. 인간은 막대기를 제니의 귀 아래에 가져갔다. 꾹. 번쩍.


- 역시 돼지는 이베리코가 최고야 아 녹는다. 미쳤네.

- 이거 그냥 교잡종이야. 그냥 처먹어.

- 어쩐지 비계가 많더라.

- 병신. 이베리코라며.


영수는 그날 전역한 민준과 함께 삼겹살과 목살을 먹었다. 갓 잡아서 그런가. 기름이 고소하고 담백했다. 잡내도 나지 않았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나. 술 때문인가. 화장실에 여러 번 들락날락했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대 여섯 번 반복됐다. 한 영수의 배는 홀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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