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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by 샤토디

어릴 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새로운 레고 시리즈가 출시되면 아버지를 졸라 손에 쥐었다. 몇 날 며칠 만지고 놀다가 새로운 장난감이 없나 백화점을 둘러보기도 했다. 무더운 날 비가 내리치면 우산도 내팽개치고 동네를 뛰어다니다가 놀이터 모래바닥에 대(大) 자로 눕기도 했다. 하얀 티셔츠와 운동화가 비에 쫄딱 젖어 빨래하기 애매한 상태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팔면 꼭 두 마리를 데려왔다. 암놈이랑 수놈하나 주세요. 병아리 장수는 옛다 하고 쥐어주었지만 딱히 성별을 구분한 것 같진 않았다.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었다. 컴퓨터랑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피시방에서 친구들과 같이 하는 게임은 훨씬 재미있었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피시방에 눌러앉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부모님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찾으러 온 동네 피시방을 뒤지고 다녔다. 뒤통수가 비슷해 보이면 의자채 홱 잡아 끌려 네 이놈 하며 연행되었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피시방을 끊을 수 없었다. 야 동욱아 너네 엄마 온대. 야 나 독서실에 잠깐 가 있는다 엄마 가면 문자 해. 응. 온라인 채팅이 너무 재미있었다. 처음 인사하는 사람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선 위에서 밤새 수다를 떨며 깊은 정을 나누었다.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손에 쥐었다. 돈 쓰는 법도 알아야 해.라는 아버지의 성은에 아주 신명 나게 카드를 긁어댔다. 친구들 밥값도 내가 턱턱 내고 사고 싶은 책, 음반, 옷 마구잡이로 척척 긁어댔다. 연말 이용내역을 본 아버지의 불호령에 신용카드는 뺏겼지만 하고 싶은 것 다 해본 것 같다. 돈 쓰는 법도 알아야 한단 말 뒤에는 돈 버는 법은 당연히 알아야 하고.라는 말이 생략되었던 것 같다.


몸이 축날 정도로 술에 취해본 적도 있고 목이 잠길 정도로 담배를 피워보기도 했다. 야 아주 나쁜 짓만 아니면 돼. 미성년자였지만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매우 나쁜 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익숙해져 버렸고 나중에는 나쁜 짓이 아무것도 아닌 짓이 되어버렸다. 짝사랑도 뜨겁게 했다. 매일 가서 눈도장을 찍고 알짱대며 내 마음을 글로 말로 행동으로 표현했다. 어설프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난 네가 좋아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조금 달랐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매달 찍히는 용돈이 궁하다 느껴졌으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생각하여 열심히 일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해. 왜? 그래야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 돈을 많이 벌면 옷도 사고 여행도 다니고 연애도 하고 집도 사고 아무튼 할 수 있는 거 다 할 수 있어. 그래서 사람들이 돈 돈 거리는 건가? 비슷할 거야. 나의 물음에 친구가 답했다.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막상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에는 하고 싶은 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매달 빠져나가는 돈이 큼지막해지자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야 넌 결국 하고 싶은 것을 한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손에 쥔 것을 내려놔. 야 근데 그게 생각보단 쉽지 않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다면 상관없지만 한 번 손에 쥔 것은 내려놓기 쉽지 않아. 손에 쥔 것을 지키기 위해 일해야 했고 앞으로도 일 해야 한다. 직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아껴야 하며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고 싶은 건 딱히 생각나질 않는다. 그저 지킬게 많아졌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한가득이다. 나이를 조금 먹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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