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든 물건이든 시간이든 뭐든 손에 쥐는 것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내가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이 크면 적당한 소비이고 그것이 작으면 사치다.
내가 내어줄 수 있는 능력이 부모님에게 달려있던 시절엔 내 손에 쥐는 것에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몰랐다. 어린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저항 없는 호의를 베풀 듯 나에게도 그러한 호의가 다가올 땐 세상이 그렇게만 돌아가는 줄 알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나에게 과자와 장난감을 주는구나. 대가가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시절 세상은 마냥 따뜻했다.
조금 더 자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발급된 신용카드를 받았을 때에도 내 손에 쥐는 것에 대한 대가를 좀체 느끼지 못했다. 교보문고에서 반지의 제왕 원서 패키지가 마음에 들어 계산대에 가져가 카드를 건넸고 할부를 권해도 일시불로 해달라고 하며, 카드를 긁고 전표를 훑어보고 찢는 아버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난 그저 할부보다는 일시불이 있어 보이니까. 전표를 신줏단지 모시듯 접어 지갑에 고이 넣는 행동은 가계부에 전표를 하나하나 붙여가며 예산을 짜야만 하는 어찌어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대가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와 내가 달랐던 것은 아버지는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카드대금을 메우기 위해 매일 분주하게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그 해 연말 자산 정리를 하시던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황금빛 신용카드는 내 눈앞에서 반으로 싹둑 잘려나갔으며 왠지 꾀죄죄해 보이는 갈색 체크카드가 손에 쥐어졌다. 내 눈에는 똥색이었다. 한 달에 30만 원씩 들어오는 체크카드. 할부가 간절해도 할 수 없으며, 전표를 모아두고 셈을 하지 않으면 한 달 생활이 폭싹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체크카드로 결제를 할 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또한 언제든 통장 잔액을 떠올릴 수 있어야 했다. 최소한의 교통비는 남겨놔야 하니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키워서 모든 대가를 적당한 소비로 만들어버리는 삶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적당한 소비만을 추구하며 사치를 하지 않는 쪽으로 살아갈 것인가.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지만 나는 (비자발적으로) 후자 쪽이 가까웠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전 검소한 편이에요 하하하." 웃고 넘겼지만 그냥 능력 없음을 에둘러 표현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아닌지라 앞으로 내가 마음껏 누리고 싶은 사치를 떠올려본다.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돈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은 사치들 중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