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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과 정

by 샤토디

오랫동안 사용한 로봇청소기가 고장 났을 때 사람들은 로봇청소기를 고쳐 쓸까 아니면 새로 구매할까? 놀랍게도 사람들은 수리비용과 매몰비용을 고려하였을 때 새 로봇청소기를 구매하는 것이 더 이익인 상황에서도 고쳐 쓰는 쪽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유는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는 로봇청소기에 정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새로운 스마트폰을 장만하더라도 굳이 쓰던 스마트폰을 처분하지 않고 서랍에 고이 두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건에 켜켜이 쌓인 손때는 주인으로부터 떨어뜨리기엔 생각보다 많이 무거워진 것이다.


내 집 장만 후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 중 하나가 캡슐커피머신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청소가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것이 아니기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둘러보다가도 애물단지가 되겠거니 하며 인터넷 창을 닫아버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커피에 대한 조예는 속된 말로 1도 없는 주제에 캡슐커피는 공장에서 가공된 커피라 취급 안 한다는 신조로 버텨왔는데 예상치 못하게 캡슐커피머신이 떡 하니 배달된 것이다.


기왕 받은 것 감사히 받고 열심히 써서 누나와 매형의 마음씀씀이에 보답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네스프레소 홈페이지에 들어가 캡슐을 종류별로 구매했다. 그런데 정말 맛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다. 캡슐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을 숙지하고 눈을 감고 느껴져라 느껴져라 집중을 해도 나에겐 그냥 커피 1, 그냥 커피 2 일뿐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오렌지향이고 어디가 초콜릿향이며 어디에서 흙맛이 느껴진다는 거지? 내 혀의 문제이겠거니라고 생각하며 캡슐마다의 향취를 알아가기도 전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하루에 한 번씩 쓰던 머신을 삼일에 한번, 일주일에 한 번 쓰더니 나중에는 한 달이 넘어가도록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엄마가 머신뒤쪽 물탱크의 물이 탁해 보인다며 머신을 해체하더니 박박 솔질을 하고 헹구고 말려서 라면과 햇반을 쌓아놓은 찬장 안에 넣어두셨다. 그렇게 캡슐커피머신과의 인연은 다한 듯 싶었다.


라면이나 햇반을 먹을 때마다 찬장을 열면 종이로 칭칭 감싼 캡슐커피머신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넌 나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해서 거기 있는 거야. 캡슐커피머신도 당연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래 네가 무슨 할 말이 있겠니. 그런데 찬장을 열 때마다 라면을 집으면서 캡슐커피머신을 한 번 더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다지 내가 책임질 것은 없지만 묘하게 마음에 부채가 남아있는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 매우 비슷했다.


꺼내서 사용해야지 라는 생각만 수백 번,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엄마가 캡슐커피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캡슐커피머신을 주섬주섬 꺼내다가 물탱크에 물을 넣고 동작버튼을 눌렀다. 윙 소리가 세차게 나더니 가느다란 갈색 물줄기가 떨어졌고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아메리카노가 완성이 되었다.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는 역시나 하얗게 먼지가 쌓인 머신을 다시 해체하여 다시 박박 솔질을 하고 헹구고 말려서 찬장에 넣어두었다. 덜어낸 미안한 마음이 또 조금씩 채워져 간다.


물건에 정이 든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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