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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by 샤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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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다.


오늘은 하루가 길었다. 내내 뛰어다니는 바람에 온몸이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가면 바로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하고 간단히 소바를 만들어 먹자고 생각했다. 밥 먹고 10분 정도 선잠을 자고 운동을 가야지. 오늘 하루도 완벽할 것이다. 지하철역을 나올 때부터 신이 났다. 이왕 씻을 거 땀을 더 내볼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화단 앞에 얼른 자전거를 묶어두고 집에 도착했다.


양말을 벗고 탁탁 털어 빨래통에 넣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 레버를 올렸다. 응? 물이 나오질 않았다. 설마 오늘 단수인 거야? 서둘러 [아파트아이] 앱을 열어 우리 단지의 게시물을 쭉 훑었다.


제목 : 물탱크 청소를 위한 단수 공고

내용 : 4월 4일 물탱크 청소를 위한… 9시부터 밤 24시까지 단수예정이니 미리 물을…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 단지 물탱크가 다 망쳐버렸다. 눈앞이 아찔했다. 물 좀 안 나오면 어떠냐 그냥 참으면 안 되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땀이 정말 많은 체질이다. 살이 접히는 곳마다 딱풀을 발라놓은 듯한 느낌을 무려 여섯 시간이나 안고 있어야 한다. 이를 어쩌나.


결국 물을 쓰지 않아도 되는 냉동볶음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적당히 배가 찬 느낌이 들어 바닥에 벌러덩 누웠고 시간이 얼른 삭제되길 바랐다. 눈을 뜨면 시곗바늘이 12시를 가리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튜브를 보다가 선잠에 들었다. 일어나니 고작 아홉 시였다. 게다가 정신도 아주 맑아서 이 이세면 열 두 시까지는 잠을 못 들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금방 또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새벽 세시였다. 열두 시가 넘으면 바로 씻어야지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는 잠에 취해 다시금 몸을 뒤척였다. 샤워가 웬 말이냐. 그리고 아침 출근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오늘 내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매 순간 계획을 세운다. 거창한 것만이 계획이 아니다. 밥을 먹어야지. 청소먼저 해야지. 이 일 먼저 해야지.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말아야지. 등등. 사소한 일정부터 결심까지 모두 계획의 범주에 포함된다. 너는 P라서 계획적이지 않고, 너는 J라서 계획적일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P는 계획을 세우기 위한 준비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을 뿐, P나 J모두 계획을 가지고 산다. 즉 모두가 그렇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아주 아주 사소한 것이 내 계획을 전부 망쳐버리는 상황이 생긴다면 때로는 허탈감과 불쾌감이 더 올라가기도 한다. 이깟 것들 때문에 내가 무릎을 꿇다니. 좌절감이야 항상 맛보는 것들이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그렇기에 아주 계획적인 사람들은 플랜 B, 플랜 B-B, 플랜 B-B-B까지 리스트를 만들어놓고 세상이 그 안에서 돌아가길 바란다. (한편 나 같은 사람들은 플랜 A도 대충 짜 놓고 그게 예상대로 되지 않으면 아으 이 망할… 이라며 푸념을 한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 간다. 아무리 계획적인 사람이라도 인식할 수 있는 계획의 범주는 점점 더 커지며, 관리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이에 사람들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내 인생이 그렇지 뭐.라는 자조 섞인 태도를 기본값으로 가지기도 한다. 계획 없이 아무렇게 사는 것을 나다운 삶을 살라는 것으로 멋대로 해석하여 방탕한 삶을 살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겐 어느 때보다도 작은 성공이 주는 달콤함이 필요한 것 같다. 네 인생이 계획대로 될 때도 많아.


별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간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오늘 하루가 내 생각대로 잘 지나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너무 난 체할 것도 없지만 기죽을 필요도 없다. 잠이 들기 전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면 그것 나름대로 다행인 것이다. 삶은 대부분 계획대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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