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많은 형태가 있다. 그중 사람들에게 우흥 하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탄식과 묘한 미소를 띠게 만드는 것은 단연코 짝사랑이다. 당사자를 제외하면 주변에서 지켜보는 관객은 그보다 즐거울 수 없다. 제발 이번에는 잘 되었으면, 또는 그 끝이 망했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를 갖게 만든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피가 마를 정도로 괴롭다. 양방향적인 사랑과는 달리 내 목소리를 꼭 들어주어야 할 사람은 내 앞에 없다. 심리적 거리의 한계인 3미터 앞까지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는 게 전부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지만 막상 짝사랑 앞에선 어버버가 끝이다.
누군가가 짝사랑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고 치자. 괴로움을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내 순결하고 아픈 사랑을 이대로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마주친다. 얼른 짝사랑에서 짝이라는 글자를 떼고 너를 쟁취하고 싶다는 마음. 고백했다가 까이면 세상이 종말 할 것 같기에 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가고 싶다는 마음. 하루에도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상담을 요청하지만 들어주는 상대만 신날 뿐이다.
만약 그렇게 석 달, 육 개월, 일 년이 지나면 그러한 애틋한 감정 자체가 인생의 활력소이자 장애가 된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단장도 깔끔히 하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짝사랑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다른 사람이 찍어준 구도의 사진이 올라오기라도 하면 눈앞이 노랗게 변한다. 설마 짝남 (또는 짝녀)인가? 그러한 마음의 그물에 갇혀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한다. 괜찮은 인연이 눈앞에서 지나가도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내 애틋한 일 년이 아까워서.
쫄보들은 대부분 이러한 짝사랑의 시간이 매우 길다. 당연하다. 이 사랑을 끝낼 강단이 없기 때문이다. 쫄보들을 무시하냐고? 아니다. 내가 호모사피엔스종의 쫄보 대표라 잘 알고 있다. 고백했다가 차이면 어떡하지? 그리고 그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어떻게 감당하지?라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상대보다 훨씬 하찮아 보인다. 처음에는 자기 관리를 통해 극복해 보려 애쓰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하찮음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중독된 상태로 몇 년 간 말라가는 것이다.
그들은 확신을 원한다.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 그거 하나면 충분하고 고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짝사랑일 수 없다. 짝사랑은 항상 비대칭이고, 비대칭 이어야 한다. 나는 널 좋아하지만 네가 날 좋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걸 알고 있으며 상대와의 심리적 관계가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우연이 내 인생에 개입하여 극적인 이벤트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나의 인생은 홀로 쓸쓸히 이 사람만 생각하며 저물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상대의 웨딩사진을 보면서. 다 알고 있다.
눈에 띄는 특장점이 있지 않는 한 감히 말하건대 쫄보들의 짝사랑은 성공할 수가 없다. 쫄보들의 짝사랑이 성공하는 것보다 쫄보에서 벗어나는 것이 짝사랑을 끝내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짝사랑이 길어지고 하루하루가 타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머릿속이 뿌예질 때가 온다. 이때 친구들이 떠미는 바람에 고백했다가 까이길 반복하다 보면 그토록 지켜왔던 나의 [고결한] 사랑도 한순간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렇게 되다 보면 짝사랑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고 뭐가 되었든 종지부를 찍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이 자라기 시작하면 은근 의향을 떠본다든지, 애매하면 일단 질러보고 반응을 살핀다든지. 이 경지에 다다르면 더 이상 쫄보가 아니게 된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모두를 응원한다. 쫄보의 짝사랑을 하고 있다면 언젠간 쫄보의 탈을 벗어던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