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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합니다

by 샤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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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결심하고 사흘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관성이 큰 사람이라 일을 시작하면 오래 지속하는 편이다. 여태껏 그만두게 된 근무지도 대부분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서다. (경영악화를 구실로 잘린 것 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다르다.

어떤 사직자들은 사직의 이유를 하나부터 백까지 읊는다. 내가 왜 이 직장을 때려치울 수밖에 없었는지 장광설을 펼친다. 한편 어떤 사직자들은 그냥 별 말 없이, 또는 하나정도만의 이유를 밝힌다. 개인사유, 건강, 이직…


나는 후자와 가깝다. 처음으로 직장 상사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직을 하게 되었다. 나만 볼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그 사람의 특징에 대해 소상히 밝히는 건 조금 비겁하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버거운 부하직원 일 수도 있다. 그냥 서로 잘 맞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자.


이유야 어쨌든 사직서를 내기 전에는 이곳을 못 다닐 정도로 숨 막히고, 직장 상사는 그렇게 악마일 수 없고, 쉬고 싶기도 하고 등등 사직의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사직서를 제출할 때에는 그 이유가 자연법칙처럼 견고했고, 제출한 직후는 하늘을 날 것처럼 어깨가 가벼웠다. 제출하고 나오는 내 모습을 본 여러 동료들은 평소 얌전한 내가 어깨춤을 추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서 전용 앱을 사용하여 구인공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좋은 조건의 자리는 순식간에 구인이 종료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며칠 째 '끌올' 중이었다. 직종이 직종인만큼 취직에는 크게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현재 직장보다 더 좋은 곳을 고르려다 보니 눈길이 가는 곳은 없었다. 취업은 정말 눈높이 싸움인 것 같다.


나는 이 시장에서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 사람들이 나를 지금보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데려올 만한 유인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젖혀진다. 나는 6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미세한 위기와 응전, 극복을 반복해서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텼을 뿐이다. 병원에서의 경력이 많다고 해도 나를 웃돈 주고 쓸 이유도 없고, 복약지도나 매약을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지금보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나를 ‘모실’ 이유도 만무하다. 내가 그들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냥 일개 약사일 뿐이다.


이렇게만 본다면 아뿔싸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다. 해방감 이후 현실을 직시했을 때 느끼는 이 초조함. 취업시장이 얼어붙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요즘애들 힘들겠다라고 입으로만 읊조리던 내가 그 야생에 뛰어든 것이다. 바이킹을 타고 하늘을 찍은 다음에 내려올 때, 내장의 간질간질함이 하루종일 지속되는 것 같다. 스릴과 걱정은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것 같다.


내 마음상태가 하루종일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도 어찌 됐든 스스로 잘했다는 긍정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미래에 지금의 나를 돌아봤을 때 그때의 선택 정말 좋았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게끔 스스로를 더 가꾸고 다져나가며 조금이라도 생긴 여유에 감사해야겠다. 아무튼 지금은 행복감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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