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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pr 03. 2020

그 여자, 그 남자의 기억법

무슨 얘기 끝에 시댁에 처음 간 날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 나는 친구네 집에서 가장 예쁜 원피스를 빌려 입고 갔다.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었던 내가 원피스를 입고 오자 남자 친구였던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날 기억해? 그때 자기네 집에서 삼계탕 먹었잖아. 

7년째 연애 중이었던 우리는 한 번도 서로의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복날이라 삼계탕을 끓였으니 먹으러 오라고 전화가 온 것이다. 

현관 앞에서 인사를 하고 바로 식탁으로 갔고 우리 둘이 편하게 삼계탕을 먹게 했다. 다른 식구들은 이미 드셨다면서. 우리가 삼계탕을 먹는 동안 어머님, 아버님은 김치거리를 다듬고 계셨다. 아버님은 쪽파를 다듬으면서 나는 이런 거 하고 산다, 라며 웃으셨다. 아버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남편이 권위적이지 않고 살림도 나눠서 하겠구나 지레짐작했다. 알고 보니 어른들은 일하고 자식들은 받아먹기만 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아무튼 남편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치마를 입고 간 것도, 처음 자기 집에 간 것도.  

삼계탕을 먹었던 것 같기는 해. 그리고 처음 당신 만난 날도 기억해. 잠실에서. 

아, 그래? 

응. 그날 내가 송편 싸갔잖아. 추석 다음날이어서. 석촌호수에서 같이 맛있게 먹었잖아.  

그럴 리가. 나는 떡을 안 좋아한다. 명절에 송편을 빚어도 한 개도 집어먹지 않는데, 식은 송편을, 그것도 맛있게 먹었을 리가 없다. 

그날 처음 만난 거라서 내 이야기 많이 했는데, 그건 기억해? 

이야기? 무슨 이야기했을까? 

아니, 어떻게 먹을 거만 기억하냐고!

그전날 사귀자는 말 한마디 남기고 막차를 타고 가버렸고, 아침에 일찍 다시 전화를 해서 오늘 만나자고 했었다. 답을 달라며. 그때만 해도 누군가를 사귀면 결혼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고민이 될 수밖에. 밤새도록 깊이 생각을 했고, 친한 언니를 만나서 조언도 들었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철학적 토론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에 맞는 철학적 질문과 서로가 알아야 할 것과 유의할 것 등에 대해 조리 있게 말하기 위해 단단히 연습을 해갔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떡은 기억하지 못한다...

송편을 가져왔다니, 뭔가 들고 다니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그걸 챙겨 왔다는 것은 나름 마음을 내었던 것이다. 분명 추석인 전날  내가 송편을 안 먹는다는 사실을 말했을 텐데도. 사실 그날 그가 무엇을 입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입은 노란색과 회색 줄무늬 티셔츠와 바지는 기억하지만, 내가 한 사랑의 질문은 기억하지만, 그의 대답, 그의 반응은 기억하지 못한다. 걸어가면서 내 앞뒤로 한 바퀴 돌았던 것만 기억한다. 그것도 그의 동작이 아니라 그때의 내 쑥스러움을 기억한다. 

사람이란, 이다지도 이기적이어서 사랑의 순간에도, 먹는 것이라는 본능의 순간에도, 오로지 자신을 기준으로 우주가 형성되는구나, 다시 한번 느낀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사랑의 첫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기준으로 기억을 더듬어간다.

 

그러니 그것이 슬픔일 때는 어떨까. 제삼자인 누군가, 아픔을 겪는 누군가, 아픔을 겪었던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일이거나 지금도 그만큼 아프거나, 아픔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4월이 되면 아픈 우리들은, 지금도 기억을 요구한다. 기억해내라고, 기억을 놓치지 말라고, 기억만이 살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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