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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20. 2020

곡성에서

곡성에 간 적이 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었다. 비가 오면 툇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싶었다. 툇마루가 있고 처마가 있는 곳은 절이었다. 무작정 가까운 절에 가서 비를 바라봤다.


간절히 비를 기다리던 즈음이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 옛날에도 맨날 티격태격했다. 이번에도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너어무 오랫동안 안 만나고 사니까 이제는 좀 만나가며 살아보자는 자성이 생긴 것이다. 가까이 사는 몇몇이 뭉치기로 했다. 생각지도 못한 동기가 왔다. 학교 다닐 때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었던 친구다. 그래도 나이 들어 만나니 반가워서 근황을 묻던 참이었다.

왁자지껄하는 와중에 곡성에 암자를 하나 샀다는 얘기가 귀에 꽂혔다. 놀러 오라고, 정말 좋다는 말까지. 갑자기 급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 가도 돼?

그 동기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표정관리를 하고, 그럼~~ 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나, 진짜 간다. 진짜로. 진짜 갈 거야.

다짐 또 다짐해 두었다.

그래, 진짜 와. 나 못가도 그냥 갔다 와. 별로 볼 건 없어. 그냥 혼자 있기 좋아.


비가 왔다. 나는 그 동기에게 문자를 했다.

나, 곡성 가고 싶은데, 지금 가도 돼?

잠시 후 답이 왔다.

그래, 가도 돼. 주소 보내줄게.

그렇게 곡성에 갔다.

부슬부슬 비가 왔다. 우산 없이도 다닐 만큼.


이정표가 곡성군을 가리키고 난 뒤에도 산으로 구불구불 들어갔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길이 약간 헷갈려서 마침 정자에 계시는 어르신들에게 길을 여쭈었다. 그게 생각지도 못한 파장을 일으킬 줄이야.

겨우 찾아들어간 암자는 정말 작은 암자였다. 문풍지를 바른 옛날 방 한 칸과 커다란 무쇠솥이 걸려있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다였다. 툇마루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대나무 숲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솨아,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는 풀 천지였는데 그래도 뱀이 나올 만큼은 아니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물을 끓였다. 차를 내렸다. 홀짝홀짝 마시며 대나무 숲을 쳐다봤다. 딱 내가 원하는 풍경이었다. 딱 내가 원하는 시간이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때, 남자 두 명이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저, 이장님 심부름 왔는데요.

네?

마을 입구에서 이장님 만나셨지요? 이장님이 손님들 식사하러 오시라고, 모시고 오랍니다.  

서른 좀 넘어 보이는 어린 남자가 말했다. 쉰이 넘은 듯한 남자는 옆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 저희는 괜찮은데...

내가 대답하기 무섭게, 안 모셔가면 저희 혼나요,라고 어린 남자가 말했다. 그래도 나 혼자라면 정중히 사양하고 말 텐데, 함께 간 언니는 흥미로운 일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마을로 걸어내려 갔다.

우리가 길을 물었던 바로 그곳이 마을회관이었다. 여기저기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슨 날인가? 하는데, 오늘이 복날이란다. 마침 삼계탕 잔치를 하는데 우리가 간 것이다.


제일 넓은 방, 가장 상석에 우리를 앉게 하고 극진해 대접했다. 좌불안석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마을에 오면 누구라도 이런 대접을 받아요.

이장님은 호기롭게 말했다.

삼계탕을 잘 먹고 나와 인사를 하니, 정자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가라고 또 붙잡는다.

여기, 참 좋아. 산 좋고 물 맑고 사람 좋고. 나도 20년 전에 여기 들어왔어.  

이장님이 말하자 주변에서 거들어 설명한다. 원래 이장님은 이 마을 초등학교 교장이었는데, 정년 퇴임하고 아예 눌어 앉으셨다고.

우리는 그냥 친구 집이 있다길래 놀러 왔다고 하자, 그렇게 놀러 왔다가 주저앉는 거라고 허허 웃었다.

우리를 데려갔던 남자 둘이 밥을 다 먹고 정자로 올라오자, 이장님은 이따 저녁은 저 두 사람이 밥을 해줄 거라고, 그럴 거지? 하고 묻는다. 나이 있는 사람이 그러마고 하자 그제야 우리를 보내주었다.


올라오는 길에 두 사람에게서 사연을 들었다. 곡성군 자체가, 아니 요즘 지방은 어디라도 인구가 줄고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오고 있다고. 이 마을도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이주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자기들도 외지에서 들어왔는데 너무너무 잘해준단다. 지방의 인구 급감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진짜로 두 사람은 저녁까지 맛있게 대접해주었다. 사람을 피해 고즈넉이 있고자 갔던 암자에서 사람의 정을 담뿍 받았다. 여름밤이지만 산속이라 일찍 해가 졌다. 더 어둡기 전에 우리 암자로 돌아왔다.

여름이었지만 아궁이에 군불을 땠다. 물을 끓여 부엌에서 목욕을 했다. 개운했다. 따뜻한 구들에서 잘 잤다. 아침까지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어 오전 내내 툇마루에 앉아 한가로움을 즐겼다. 잠시 두 남자가 별일 없는지 우리를 들여다보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어떨 때 산속 깊은 곳을 찾아가는지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을에 꼭 다시 오자고 했지만 다시 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 2년 뒤엔가, 곡성 영화가 나왔다. 영화가 먼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지금은 주소도 잊었고, 무슨 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감나무가 많은 산이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처럼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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