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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3. 2020

쫄지 마, 그래 봤자 그림이야

다르게 놀기, 다르게 보기


매일 그림을 그리니까 그림이 쑥쑥 늘어서 이제는 제법 잘 그리느냐고? 그럴 리가. 그림은 지지부진했다. 매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고 어찌어찌 그려놓고도 이걸 진짜 남들 앞에 내놔도 되는 건지, 남들의 안구를 먼저 걱정해야 했다. 언젠가는 나아질 수 있을까 불안했고 이런 시간들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좋은 점도 있다. 못난 그림을 자꾸 내놓다 보니 면역이 되어서 못난 나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매일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지겨웠다. 그림은 지겨움을 참는 일이다. 지겹지만 지겨워하지 않고 계속 그리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래도 지겨울 땐 생각하지 못한 어떤 것을 시도해본다. 내게는 그것이 아크릴이다.     


어쩌다 보니 아크릴 48색이 집에 있다. 왜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쓰다 남은 거겠지. 어쨌든 있는 도구니까 써보기로 한다. 하지만 아크릴의 특징을 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유튜브를 검색했다. 아크릴은 통념과는 반대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밝은 색을 먼저 쓰고 나중에 진한 색을 쓰는데 아크릴은 진한 색을 먼저 쓰라는 거다. 밝은 색이 진한 색으로 완전히 덮어진다는 의미인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완전 반대라기보다는 진한 색 위에 밝은 색을 얹어서 포인트를 만든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다. 또 하나, 물감이 빨리 마르니까 서둘러 그려야 한다는 것. 역시 그려보니 그림도 빨리 마르고 짜 놓은 물감도 빨리 말라버린다. 바로 이것이 아크릴의 매력인 것 같다. 색이 서로 스미고 배어들 틈이 없다. 색칠한 위로 다시 다른 색이 얼기설기 입혀진다.       

신석주 님의 유튜브를 보았는데 그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쫄지 마. 그래 봤자 그림이야. 뭘 쫄고 그래” 맞다. 그래 봤자 그림이다. 새로운 도구를 활용하려니 살짝 마음이 쫄아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가슴을 쫙 폈다. 과감한 모험을 하기에 딱 좋은 도구이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거나 몸집이 큰 친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 아버지조차 눈을 마주치는 것이 겁이 났다. 거칠게 생긴 남자, 남들이 말하는 상남자를 싫어했고 심지어 미워했다. 그 이유를 정세랑 작가님의 <웨딩드레스 44>라는 작품을 읽다가 알았다. 

"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 4일째 되어서야 알았다. 두려운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최악의 상상들이 연이었다."

이 문장을 보고서 나의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고난 두려움이었다. 항상 최악의 상상들이 따라붙는다. 두려움은 분노감으로 발전했다. 분노는 내 오랜 무기다. 쫄리지만, 맞붙어 싸운다.

누구나 그런 두려움과 분노가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위협이 있든 없든 인간은 실상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기에 그 안에서 안전을 바라고 안심하고 사는 거지 원초적 위험과 불안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그림은 정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50 평생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았는데 그래 봤자 그림 앞에서 뭘 그리 쫄고 있나. 쫄지 마!라고 책상 앞에 써 붙인다.     

이왕 쫄지 말고 그릴 거라면 좀 더 과감하게 색깔 놀이를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아크릴은 색을 섞어서 사용하기가 몹시 불편하다. 원하는 색을 만들기도 힘들고 색 위에 다른 색을 얹었을 때 어떤 효과가 나올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색깔 놀이다. 추상화를 그리는 기분으로 그린다.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세심한 붓 터치도 굳이 하지 않는다. 어차피 세심한 것은 잘 못한다.

그렇게 툭툭 던지듯 색을 얹다 보면 연필화나 붓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것을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어도 되나 싶을 만큼 다른 세계다. 내 안에서 끄집어내어 지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펜화나 연필화가 내 안의 나를 토닥토닥 다스리는 것이라면 아크릴화는 나를 분출하는 기분이다. 분출이라서 그런지 자주 하기는 어렵다. 쫄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쫄아질 때, 내게 쫄지 마, 주문 걸고 싶을 때 아크릴을 꺼내 든다.     

아크릴로 그릴 때는 붓 말고도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한다. 다 쓴 치약 뒷부분으로 물감을 문지르기도 하고 칫솔로 두드리기도 한다. 주방에서 쓰는 랩이나 포일로 물감을 구겨보기도 한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차차,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더 해보자, 가 된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아크릴을 써보기 전에는 크레파스가 내게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쫄지 마를 알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쫄아서 썼다. 이 투박하고 뻑뻑한 재료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기도 했고, 화지를 채울 것이 걱정이 되었다. 어릴 때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가. 크레파스를 마구 문질러서 화지를 꽉꽉 채우라고. 흰 곳이 보이면 안 된다고. 진하게 칠하는 게 두렵고 힘든 나는 화지 가득가득 색을 발라야 하는 게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색이 섞이지 않는 이 도구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색의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과는 빨갛게, 하늘은 파랗게, 나무는 초록으로 칠하는 것밖에 모르던 이 도구에 대해 배울 기회가 생겼다. 바로 취미 예술가 모임이었다. 그들도 원데이 클래스 등 개인적으로 배워온 것을 모임에서 다시 푸는 거다. 크레파스가 오일 파스텔 만드는 회사 이름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크레파스가 아니라 오일 파스텔이라 불리는 이 도구는 우리가 어릴 때 사용했던 크레파스보다 훨씬 부드러웠고(비싸면 비쌀수록 더 부드러운 것 같다), 문지르는 도구가 따로 있어서 그걸로 문지르면 서로 색이 섞일 뿐 아니라 매끄럽게 화지의 흰 부분을 메워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흰 부분을 꽉꽉 메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색을 섞지 않고 일부러 다른 색깔을 두드러지게 칠하기도 하고 심지어 내가 붓을 쓰듯이 선을 긋기만 해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오일 파스텔로 크로키를 그리고 놀았다. 진하게 가득 메우지 않아도 된다니 훨씬 편하고 재밌고 안심이 되는 색깔놀이를 할 수 있었다.            

색깔 놀이 말고 질감 놀이도 있다. 사포 위에 크레파스로 그리는 거다. 똑같이 색을 얹는 것인데도 사포 위에 얹는 것은 마치 내가 그 질감을 만들어 내는 기분이 든다. 내 실력으로는 아직 입체감을 표현하기 힘든데 사포는 질감 자체가 입체감을 준다. 점묘화처럼 색이 떠있어서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함이 있다. 사포는 꼭 철물점에서 사기를 권한다. 다이소에서 샀더니 너무 작고 가격도 더 비쌌다. 사포의 거친 표면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종류별로 골라서 내게 맞는 것을 고르는 즐거움도 있다. 나는 400을 쓴다. 숫자가 작을수록 더 거친 것이다. 1000으로 샀더니 질감 놀이를 하기에는 너무 부드러웠고 100으로 샀더니 크레파스를 문지르면 크레파스가 뭉텅뭉텅 줄어드는 기분이 들어서 부담스러웠다. 사포에 그릴 때는 아이들이 썼던 값싼 크레파스를 쓴다. 내게는 아주 비싸고 좋은 오일 파스텔이 있는데, 내 그림을 처음으로 사준 지인이 선물해주었다. 얼마에 팔겠냐고 자꾸 묻더니 결국 그 비싼 오일 파스텔을 보내주었다. 그러니 그걸 사포에 문지르면 내 살이 깎여나가는 것처럼 아깝다. 내 그림 값의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얹어주었는데, 그 기준으로 팔면 앞으로 그림 팔기는 글렀다...     

사포 말고도 포장지, 박스지, 휴지 등에도 그려봤는데 사포만 한 새로움은 없었다. 포장지는 너무 미끌미끌했고(하지만 포장지마다 다양한 밑그림이 있어서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쾌감은 또 남달랐다. 마치 귀중한 고서에 낙서를 하는 기분이랄까), 박스는 그에 맞는 적당한 그림도구를 못 찾은 느낌이었다. 휴지는 화선지 같은 익숙함이 있다.

사포는 짙은 검은색이 바탕색이라는 것도 매력적이다. 빛의 세상에서 살다가 갑자기 어둠의 세상에서 색을 찾아내야 하는 색의 전사가 된 것 같다. 어둠의 세상에서는 원래 보이는 색과는 다른 색으로 칠해진다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기꺼이 감내하고 써보면, 과감하게 다른 색을 집어 들 수 있게 된다.     

그림은 다르게 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해체하고, 지금 여기, 에서 느끼고 숨 쉬고 만져지는 것으로 재구성한다. 보이는 것을 완전히 잊어야만 보이는 세상이다. 앎의 규모는 아직 작지만 선명하다. 쫄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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