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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16. 2020

쪽팔림의 기록

#슬기로운 sns 생활, #인정과 위로

뛰지 마, 넘어지지 마, 다치지 마.

산책길에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왜 뛰지 말래? 아이가 뛰는 건 당연한 걸. 아이들은 뛴다. 밖으로 나오면 더 뛴다. 뛰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수시로 다쳐서 깁스를 했다. 그게 자랑은 아니지만 깁스를 할 정도로 다친다고 해서 다칠 일을 하지 말라고 말린 적은 없다. 이건 자랑이다. 넘어져도 괜찮아. 엄마한테 와. 호~해줄게. 부모가 해주어야 할 일은 다치지 않게 말리는 일이 아니라 다친 아이를 보듬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그것도 나처럼 나이 들어 그림을 그리면 넘어져도 괜찮지 않다. 호~해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하자고 말했다. 넘어지면 하기 싫어지니까. 그러다 내게도 호~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바로 sns 팔로워들이다.     

그림은 혼자 그리는 거다. 하지만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매일 그린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속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하다. 원래 sns는 자랑, 플렉스 하는 곳이라지 않는가. 그러면 제대로 플렉스 해야지. 매일 내가 그리는 그림을 올리고 자랑하고 무차별 하트를 받고 그 힘으로 다시 내일 또 그리는 거다. 처음에는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도 없고 팔로워도 없으니 기운을 받기 어려웠다. 매일 그리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크게 마음 쓰고 부대끼지 않는다.   

아니, 아니다. 많이 부대꼈다. 소셜 네트워크가 아니면 어디서 덜 익은 내 그림을 내보이겠는가. 그리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관종이다. 나처럼 평생 제대로 된 이름을 불리지 못한 경우는 더욱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다. 다만 크게 바라지 않는 양심은 가졌다. 한두 명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적은 숫자라도 행복하다. 아무 대가 없이 내 그림을 봐주다니. 좋아요도 눌러주다니. 사실 sns는 일종의 품앗이다. 아주 유명한 사람 말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거다. 잘하고 못하고를 보는 게 아니라, 어제도 오시더니 오늘도 오셨군요, 내일도 만나요, 하는 인사다.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일수록 많은 팔로워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중하게 팔로워를 골랐고, 좋아요를 누를 때도 정말 좋은 게시물에만 눌러줬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아끼나. 아끼다 똥 된다는데 아낄 걸 아껴야지. 퍼줘도 줄어드는 거 하나 없이 오히려 내 하트가 늘어나는 그것을 뭐한다고 아끼냔 말이다. 주는 만큼 기대하지만 않으면 된다. 주느라 내 시간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퍼붓지 않으면 된다. 어차피 하트나 팔로워 수로 내 그림이 달라지지 않는다. 기대치가 아주 낮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마음으로 sns를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는다. 그림이 잘 안 되는 날, 그림이 잘 되는 날 모두 그들의 손길로 안정이 되었다.     

비판적 지지자. 그것이 나의 포지션이었다. 질문하고 의심하고 바로잡는 것이 중요했다. 필요한 질문이었고 합리적 의심이었고 바른 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가끔은 무조건 지지하고 무조건 응원하고 무조건 위로하는 것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 어쩌면 시대적으로 그러하다. 심지어 그것이 온라인상에서의 작은 마음을 주고받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 안에 진심이 조금 덜 담긴 것도 안다. 모든 것에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으니까 상관없다. 진심은 가끔 부담스럽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진심이 건너오기도 한다. 그 진심은 익명의 공간이라 솔직하다.

나보다 아주 조금 못 그리는 사람(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나보다 조금 더 잘 그리는 사람을 팔로우했다. 너무 잘 그리는 사람들은 걸렀다. 좌절만 안겨주니까. 배울 거리가 내 눈에도 포착되는 수준의 사람이 딱 좋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내 눈도 발전해서 배울 거리는 점점 늘어났다. 누가 봐도 잘 그린 그림이지만 내가 흉내 내기에 어려우면 당분간 멀리했다. 나보다 조금 못 그리는 사람에게 부지런히 하트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그들과 끌림과 당김을 주고받는다.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은 수준급의 작가도 팔로우한다. 감히 따라 할 생각도 못하고 얼어붙을 정도여야 한다. 가끔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환기가 되어주었다.      


꾸준하게 sns에 기록해놓으면 일종의 포트폴리오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요즘에는 그 사람을 알기 위해 sns부터 살펴보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까. 조금 부담스럽기도 한데 나 또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알아가고 있다. 게다가 작가도 sns로 홍보를 해야 한다. 그림 작가는 못되지만 글 작가는 될 거니까 미리 나를 알려놓는 거다. 

sns에 올리기 위해 그림을 사진으로 찍으면 또 다른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르게 새롭게 보인다. 또, 맨눈으로 발견하지 못했던 부족한 부분이 사진으로 보면 더 눈에 잘 띄기도 한다. 완성하기 전에 일부러 사진을 찍어서 살펴보면 좋다.     

sns는 그림을 보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장점이라기보다는 유혹이다. 나는 그대로 올리는 쪽을 택했다. 보정을 한다면 그림에 조명이 비추어질 때를 상상하고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끔 잘못 그린 그림을 올리기 민망할 때가 있다. 다시 잘 그려보고 싶지만 그럴 만한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창피한 마음만 커져서 올리기 싫을 때도 있다. 못하는 지금의 나를 인정하자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래야 잘하는 내가 있다. #지금은 안되지만 언젠가는 되겠지 라는 해시태그를 붙인다.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가 그랬다. 후진 나를 참아 넘겨야 한다고. 한순간의 쪽팔림은 점차 성장하는 나의 역사로 남는 거다.    

물론 sns의 인정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sns는 창작자에게 독자나 관객과 나누는 진정한 소통과는 다르다. 팔로우나 좋아요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창작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한 명의 독자와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위로를 주는 반짝이는 별과 같달까, 향기로운 꽃과 같달까. 

국카스텐의 음악 중 <YOUR NAME>이라는 곡이 있다.     


그대는 뭘 찾고 있나요

뒤집힌 거울에서

거울 뒤에 숨어서

원하는 걸 찾아냈나요

고개를 숙이고서

기다려요 조금 더

내가 인정해주겠어요 그댈

참아봐요 조금 더

내가 정의를 내릴게요 그댈     

모두가 사랑을 줘요

좋아요 부러워요

당신의 이름을 여기서

구걸하는 거예요

빈 괄호 속에서     

당신의 이유를 여기서

구걸하는 거예요

당신의 비밀을 여기서

구걸하는 거예요

빈 괄호 속에서     


넘어지면 호, 해주는 사람들이 SNS 상에 있다. 그러니 가끔은 넘어질 만큼 달려보는 것도 괜찮다. 넘어져 울다 보면 나의 이유, 나의 비밀이 찾아지기도 한다. 너의 인정, 너의 사랑은 나 스스로의 인정, 나 자신에 대한 사랑 위에 손을 보태어주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나의 인정 나의 사랑이 먼저다. 원하는 것은 거기에 없다. 원하는 것은 내 그림 안에 있다. 빈 괄호 속에 내 그림을 가득 채워 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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