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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Feb 16. 2021

명절 생리증후군

명절이면 꼭 생리를 했다. 대체로 생리주기가 정확한 편인데 명절이 가까워오면 기가 막히게 그때에 맞춰졌다. 나중에는 생리주기와 상관없이 명절날 아침 툭 터지곤 했다.

내 집도 아니고 시댁에서 생리를 치르는 일은 너무 곤혹스러웠다. 화장실도 하나이고 식구들 눈도 많았다. 눈을 피한다 해도 냄새는 어쩌랴. 정말 지긋지긋했다. 일을 하거나 심리적인 불편함 때문에 명절 증후군을 겪는 게 아니라 순전히 생리 때문에 명절이 싫었다.  


특히 산소에 가는 날은 어김없었다. 산길을 많이 올라가야 하고 산 입구에 화장실도 변변찮아서 생리가 아니어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몸을 많이 움직이니까 대사가 활발해지는 건지 유난히 생리양이 많아졌다. 새벽에 출발해서 성묘를 하고 내려오려면 적어도 5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대형을 써도 오전 내내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 어려움을 호소해도 며느리를 빼주는 시어머니의 아량 따위는 없었다. (평소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지만 이런 구체적인 일을 떠올리면 흥칫핏, 얄밉기만 하다.)


드디어 완경이 되었다. 2년이 넘게 생리를 하지 않아 날듯이 기뻤다. 명절증후군도 씻은 듯 없어졌다.

그런데, 3년째 되는 어느 추석날 아침, 갑자기 생리가 터졌다. 이 정도면 제삿밥 먹으러 오는 귀신 못지않은 거 아닌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너무 많이 쏟아져서 바지가 다 젖었다. 점퍼를 벗어 엉덩이 부분에 매었다. 산 아래 주차해둔 데까지만 무사히 가기를 바랐지만 속절없이 쏟아졌다. 그대로 있다가는 점퍼로도 가릴 수 없는 상태가 될 거 같았다. 시어머니를 앞세워 으슥한 곳으로 가서 패드를 갈았다. 시어머니가 아니면 마땅히 누구를 앞세우겠는가. 나는 나중에 며느리를 절대 산소에 데리고 오지 않으리라 이를 갈며 다짐 또 다짐했다(며느리가 생기긴 할라나 모르지만).


이제는 진짜로 완경이다. 그런데도 아직 꿈을 꾼다. 명절을 보내면서 두 번이나 생리가 쏟아지는 꿈을 꾸었다. 진땀을 흘리며 잠을 깼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시험 꿈을 꾸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시험지가 이상하거나 연필이 안 나오거나 다 썼는데 내려는 순간 다 지워지거나, 암튼 시험에 대한 꿈을 40대까지 꾸었다(공부 못하는 아이가 스트레스만 받는다던데). 이제는 어김없이 생리 꿈을 꾼다. 꿈을 꾸면서 생각한다. 요새 나 스트레스받는 거 있나?


이번 명절에도 생리 때문에 힘들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으리라. 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또는 코로나 때문에 생리로부터, 명절로부터 놓여난 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고맙진 않다. 생리만큼 눈치 없는 놈아. 제발 꺼져라.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이 겪는 고통인데 남자들은 이런 부분은 생각지도 못 것이다. 하긴 나도 명절은 명절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생각했지 나의 생리가 고통을 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다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안다. 생리가 있는 상태가 기본 치였기 때문이다. 여자에게는 생리가 상수고 명절이 변수다. 생리가 없는 지금 얼마나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편하고 넉넉해지는지. 예민하게 날을 세울 일도 없고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나이 든 여자들이 호기로워지는 건 호르몬 변화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생리가 없는 자유로움 때문일지도. 아니, 사실은 상수가 바뀐다는 것은 삶의 체계가 통째로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그만큼 사고 체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내안에 다양성이 분화되어 사려깊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조건을 최대로 확장하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따듯하고 자유로운 인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나, 꼭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으다).


어쨌는 모든 생리하며 명절을 맞은 이들이여. 고생많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가 아니라 세월 가면 완경 온다. 그때 상수였을 때는 몰랐던 쾌감을 함께 누리자. 힘내시라!



사진출처 https://pixabay.com/vectors/evolution-science-infinite-darwin-491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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