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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24. 2021

림보

스마트소설

언니! 여기야, 여기!

해진아! 세상에, 널 만나다니!

나도 믿어지지 않아. 언니를 다시 만나다니!

그래, 그래. 반갑다.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잘 먹고 잘 쉬면서. 여기 맛집도 많거든.

먹는 거 밝히는 건 여전하네.

본성이 어디 가나. 아이쿠, 비 온다. 언니, 여기 우산.

갑자기 웬 소나기냐?

소나기인지, 국지성 호우인지. 요즘 맨날 이래.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만.

나도 언니가 와서 너무 좋아, 좋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그러게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래도 네 딸들이랑 3년 동안 김장하기로 한 약속은 지켰잖아.

맞다. 그런 약속을 했었지. 나는 잊어버린 그 약속을 언니는 지켜줬구나. 고마워, 언니. 우리 애들은 잘 있어?

그럼. 잘 있어, 얄미울 만큼. 큰애는 더 야무져지고 더 예뻐졌고, 작은애는 여전히 친구들이랑 키득거리느라 바쁘고.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 나, 오기 전에 엄마 문제 정리했잖아. 우리 애들한테 엄마에 대한 원망이 대물림될까 봐 기어이 끊고 왔어.

그랬구나. 네 딸들 보니까 알겠더라. 남은 게 없어 보였어.

우리 남편은 어때?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했어. 남몰래 울기도 하고. 이제 좀 괜찮아진 거 같아. 수염도 정리하고, 일도 다시 하더라. 얼마 전 페북에 장모님이 끓여주신 도다리쑥국이라고 올라왔던데.

울 엄마, 딱 그거 하나 부탁하고 왔는데, 잘하고 있네. 이제 진짜 잊어버려도 되겠다. 언니, 형부는 어때?

그 사람은 잘 지낼 거야, 가끔 내 욕해가면서. 전에 네 욕도 하더라. 평생 너한테 얻어먹어야 하는데 아쉽다고. 네 동서까지 자기가 취직시켜줬는데, 제대로 우려먹지도 못했다고.

맞아, 맞아. 그랬지. 그거 말고도 힘들 때마다 형부한테 신세 많이 졌지. 욕먹어도 싸. 그러고 보면 형부는 참 한결같아.

한결같이 철이 없어. 어쩌면 그렇게 자신만 돌보고 사는지. 애들도 아빠 닮았어. 앞으로도 그래 주면 좋겠네.

언니는 여전하네. 의연한 거. 걱정이 안 되지는 않을 텐데.

아니, 걱정 안 돼. 난 그러기로 했어. 하루하루 내 감정에 충실했어. 그거면 돼.

그래도... 뒤늦게 시작한 덕질은? 실컷 했어? 아쉽지 않아?

아, 그래. 아쉬운 거 딱 하나. 덕질이지.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공연 금지됐잖아.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은 시간에서 2년이나 못 봤어. 흐엉,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화나.

아, 맞다. 코로나가 도대체 뭐야? 엄청 말도 많고 걱정도 많던데.

네가 코로나를 안 겪고 갔지? 말도 마. 진짜 끔찍한 기간이었어. 호흡으로 바이러스가 전염이 돼. 숨 말이야. 숨을 나누면 안 되는 거야. 전파속도가 엄청나서 걸리면 가족도 못 만나고 격리돼 버려.

진짜? 아픈 가족을 보지도 못하고 돌보지도 못하는 거야?

돌보기는커녕 죽으면 바로 화장해서 뼛가루만 넘겨주는 게 다야. 산 사람도 그래. 어느 날 자전거가 지나갔는데, 뭔가 못 볼 걸 본 기분인 거야. 뭐지? 생각해보니 그 사람이 마스크를 안 쓰고 있었어.

세상에, 인간의 입을 보다니, 그런 거야?

응. 키스도 금지했으니까.

그 정도면 정부에서, 아니 전 세계적으로 뭔가 대책을 세웠을 거 아냐.

대책을 세웠지, 백신도 만들고. 하지만 백신조차도 힘있는 국가가 움켜쥐고 탄소위주의 에너지는 여전했어. 오만한 인간은 전세계적인 위기에서도 반성이라고는 없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만나지도 못하게 했구나.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여기 온 사람들이 영향을 끼친다고? 그게 저승에 와서도 남아있는 거야? 이제 끝, 아니야?

언니. 끝은 없어, 하나의 우주니까. 모든 건 연결돼, 무섭도록. 이제 여기가 이승이지만.

아, 내가 있는 곳이 이승이지. 이승이건 저승이건 그대로 이어지는 거구나.

어디로 사라지지 않아, 이미 저질러진 일은. 그새 비 그치고 해 쨍쨍한 거 봐. 곧 여기도 닥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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