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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Dec 11. 2020

여섯 개의 공포

살아 남으라

1.

아이는 눈을 감았다. 세상은 왜 전부 네모 투성이인가. 네모 끝에 선 사각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다. 아이는 동공을 좁히고 시선을 아래로만 향한다.

어릴 적 뜨개바늘에 찔리면서부터라고 기억한다. 손에 상처가 났고 멍이 오래 남았다. 뭉툭하게 보였던 뜨개바늘이 몸을 포처럼 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뾰족한 것들이 머릿속을 뒤흔들어놓을 때는 사실과 망상이 뒤섞일 경우가 많다. 필기 중에 갑자기 연필 끝이 되살아날 때는 난감하다. 종이 위에서 창칼이 춤을 춘다. 연필심이 있는 부분이나 지우개가 달린 뒷부분도 위협적이다. 휘어지고 날카로워지고 눈을 향하고 가슴을 향한다. 다행히 필기가 줄어들고 프린트로 대신하는 수업이 많아졌다. 아이는 요리를 할 때도 가능한 칼을 쓰지 않는다. 과일과 야채도 가급적 껍질째 먹는다. 껍질에 영양분이 많다고 하고 맛도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화면 끝의 모서리가 신경 쓰이면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화면 안쪽을 보기 위해 애를 쓴다. 눈은 나빠지겠지만 집중력이 생긴다.

아이의 소원은 지구처럼 둥근 세상이 되는 것이다. 둥근 흙집을 짓고 둥근 창문을 내고 둥근 세상을 내다보는 것이다. 둥근 러그를 깔고 둥근 원탁을 놓고 둥그런 접시를 올려놓는 것이다. 둥근 소파를 놓고 둥근 쿠션을 끼고 고양이처럼 둥글게 몸을 마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각이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을 때마다 가만히 눈을 감는 수밖에 없다. 질끈 눈을 감고 세상의 수많은 거슬리는 것들을 향해 욕을 한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을 내가 다 갈아버리겠숴!  



2.

그녀는 햇빛을 보지 못한다. 밝은 형광등도 불편해하는 걸 보면 빛 자체가 그녀를 공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격당한 그녀는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여름날, 카페 창가에 앉았다가 그녀는 블라인드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비가 와서 날이 흐려도 햇빛은 힘을 잃지 않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누군가는 심리적인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하고, 누군가는 운동을 많이 해서 면역을 키우라고 한다. 어떤 것이 원인이라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콩나물처럼 어두운 방으로 숨어들거나 그녀만의 시간 속에서 살아남거나. 해가 떨어지기 전 노을을 지나 해가 떨어지고 난 후의 노을부터가 그녀의 시간이다. 밝은 형광등을 켜는 시간에는 잠시 쉬었다가 낮은 조명이 들어오는 늦은 밤, 다시 그녀는 살아난다. 살아난 그녀는 햇빛 속 다른 이들처럼 환하게 활기차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으로 살아간다. 새벽형 인간이나 야행성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꽃은 달맞이꽃이다.  



3.

그는 개가 무섭다. 개를 포함한 모든 동물들을 무서워하는데 그중 개가 가장 무섭다. 왜냐면 가장 자주 만나기 때문이다. 현관문만 열어도 옆집 개가 왈왈 짖어댄다. 산책을 나가면 최소 다섯 번은 개를 마주치는데, 개 주인은 길게 늘어뜨린 개줄을 당길 생각을 안 한다. 좁은 보도블록에 난간까지 있을 경우 정말 난감하다. 아무리 무섭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개는 그가 무서워하는 걸 기막히게 알아채고 그를 향해 짖어댄다. 세상은 나이 지긋한 성인 남자가 개를 무서워할 수 있다는 사실은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개 주인은 그에게 덤벼드는 자기 개를 감당하지 못할 때 덩치가 큰 그의 탓을 하기도 한다.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어른들은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남자아이가 개를 무서워하는 걸 남자답지 못하다고 야단부터 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는 크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었다. 자라면서 어떻게든 어른이 되기 전에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비웃음거리로 삼는 이들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을 보면 살기가 돋는다. 가장 나쁜 건 걱정해주는 듯 괜찮아요, 안 물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 물지 그럼. 안 물어야 하고 말고. 그는 절망과 짜증으로 개 주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그도 대부분의 개들이 물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기 때문에 물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작은 강아지도 무서워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도 작은 동물이 귀엽다. 동시에 그는 가장 기득권을 가진 인간 성인 남자로서 가장 약자에 처한 동물들을 애처로워했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다. 모든 동물을 귀여워하고 만지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동물을 이질적으로 느끼고 가까이 가기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가 개를 피해 멀리서부터 돌아갈 때 개 주인도 그를 피해 돌아가 주는 배려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른이나 아이, 남녀 상관없이 개를 무서워할 권리, 피하고 싶을 때는 피할 자유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란다. 제발 엘리베이터 같은 작은 공간에 같이 타지 않을 자유를 달라. 괜찮다고 하지 말고 먼저 가시라고요.  



4.

언젠가부터 여자는 드라마의 갈등 장면을 보지 못했다. 위기가 고조되고 다시 해결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다고 하는데 드라마에서 드라마틱한 것을 보지 못하니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다. 한 회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은 대부분 갈등 상황으로 끝나는데 여자는 미리 자리를 뜬다. 특히 예고편에는 더한층 꼬인 갈등 상황을 보여주는데, 알고 보면 시청률을 위해 일부러 연출하고 편집한 것이다. 예고는 대부분 틀리므로 예고가 아니다.

여자는 기업이나 병원, 시월드가 배경이 되는 막장 드라마는 절대 보지 않는다. 어쩌다 그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등과 어깨가 결리다고 끙끙댄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여자의 남편은 뭘 그렇게까지 감정이입을 하냐고 타박이지만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요즘은 그래도 착한 드라마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어 여자를 즐겁게 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청춘 기록> 등이 그러했다. 단단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삶을 장악하고 있어 사랑에 잡아먹히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여기서도 예고편에서는 갈등을 보여주지만, 회가 거듭할수록 여자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아니야, 아니야. 저렇게 보여주지만 막상 그런 내용이 없었잖아. 괜찮아...   

여자가 드라마보다 더 괴로워하는 것은 스포츠 경기다. 평소 스포츠 경기를 챙겨보지는 않지만 국제 경기 특히, 한일전은 안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자는 골인 장면을 보지 못한다. 골이 하프선만 넘어가도 숨이 넘어갈 듯 불안하다. 02년 월드컵 때도 그랬다. 그때 여자의 아기가 막 백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아기를 업고 내내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아파트 단지 안을 걷다 보면 와,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게 넣었다는 소린지 먹혔다는 소린지 알기 어려워 답답했다. 좀 정확하게 소리 질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경비실 안을 기웃거리며 아저씨 표정으로 상황을 가늠했다.

여자는 아기를 재워놓고 지난 경기의 골인 장면을 돌려봤다. 거품 빠진 맥주처럼 싱거웠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격정의 시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인데, 그 격정의 시간을 버티지 못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5.

아기는 아토피가 심했다. 태어난 지 한 달 남짓부터 태열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뒤 말끔해졌었다. 이유식을 먹으면서부터 간간히 붉은 반점이 생기더니 긁어대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유식을 꼼꼼히 적었다. 재료를 두 가지 이상 섞지 않고 한 가지로만 조리했다. 양배추, 당근, 감자, 호박... 대부분 문제가 없었다. 쌀미음을 주면서 알았다. 아이는 쌀에 반응했다. 생선도 괜찮고 고기도 괜찮고 과일도 괜찮았다. 오로지 쌀만 거부했다. 아기 할머니는 한국인이 어떻게 쌀을 안 먹고살 수 있겠냐며 적응시켜야 한다고 우겼다. 콩나물국을 간을 약하게 해서 밥을 으깨 먹였다. 아기는 밤새 긁으며 울었다. 며칠 만에 반점이 좀 가라앉자 찹쌀죽을 해 먹였다. 다시 반점이 올라오고 엄마는 아기가 긁지 않게 밤새 손으로 만져주느라 잠을 못 잤다.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햅쌀을 사고 막 도정을 한 쌀을 사고 오분도미를 사고 수입쌀을 샀다. 오래 끓이기도 하고 살짝 끓이기도 하고 찌기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기는 소면을 먹는다. 할머니는 국수 먹는 종자가 자리를 잘못 찾아왔는가 보다고 혀를 끌끌 찼다. 모르겠다. 아기가 자리를 잘못 찾아온 건지 또 다른 자리를 열어가야 하는 것인지. 할머니는 영양에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른 것을 골고루 잘 먹어서인지 괜찮았다. 할머니는 특별한 아기니까 특별한 사람으로 클 거라고 했고 엄마는 특별한 아기니까 특별히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아기는 남들처럼 크고 있다. 먹을 때마다 성분표를 꼼꼼히 살펴야 하지만.

     


6.

남자는 술을 좋아했다.  술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고 찰랑찰랑 잔이 넘치게 술을 따라도 흘리는 법이 없었다. 남자는 술독에 빠져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남자도 아이 적에는 이런저런 다른 꿈이 있었겠지만 지금 남자에게 남은 꿈은 그것뿐이었다.

남자는 술 취한 사람을 극혐 했다. 남자는 절대 취하지 않았다. 3박 4일을 마셔도 끄떡없었다. 취한 사람을 피해 남은 사람들끼리 술을 마셨다. 술은 남자에게 하나의 세상이었고 우주였다.

그런 남자가 어느 날부터 취하기 시작했다. 취하다니, 내가 술에 취하다니, 남자는 완전히 당황했다. 몸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고 남자는 온갖 병원을 다니면서 온갖 검사를 했다. 의사들은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하다고 했다. 피도 맑고 간도 깨끗하다고 했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니 취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말했지만 남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술 마시면 취하는 건 병이라고, 남자는 의사를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6개월간 술을 끊었다. 그동안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숙취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자체 판단을 내렸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이 아무리 꼬셔도 넘어가지 않았다. 반드시 이 병을 고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6개월을 버티고 드디어 금주 해제의 날이 왔다. 분명히 이제 취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3박 4일을 마셨다. 2일까지는 끄떡없었는데 3일째 되는 날,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흔들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하루 더 남았는데. 남자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 말만 되풀이했다.      

눈을 떠보니 자신이 술상에 엎어져 있었다. 친구들은 다 가고 혼자 남았다. 사 온 술이 아직도 반 양동이나 남아있는데. 남자는 억울했다. 술에 지기 전에 술독에 빠졌어야 했는데 뭐 하느라고 그동안 술을 더 많이 마시지 못했나. 더 열심히 술을 마시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한 젊은 날을 후회했고, 잘못 판단하고 6개월 간이라는 긴 시간을 허송세월 한 것을 후회했다. 남자는 술이 남은 양동이에 머리를 박았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술이 넘쳐 바닥에 흐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내가 드디어 술독에 빠졌다! 나도 드디어 소원이라는 걸 이뤄봤다! 남자는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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