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Jun 17. 2021

법은 불완전한 정의다

세상의 모순을 기록하기 1

드라마 <로스쿨>을 즐겨보았다. 드라마 내용과 무관하게 마지막 회에서 충격을 받았다. 두 로스쿨생이 재판정에서 한 할아버지를 돕는다. 아들의 부채가 이자까지 붙어 어마어마하게 불어서 집을 빼앗길 상황이다. 어린 손주와 길에 나앉게 된 할아버지는 그저 선처를 구합니다, 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판사는 할아버지에게 변호사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하지만 할아버지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본 두 로스쿨생은 잠시 휴정을 요청하고 할아버지에게 말해준다. 그 부채는 이미 시효가 지났으므로 갚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한 문장을 법률용어를 섞어 따라 하게 한다. 할아버지가 기뻐하며 그 장면은 끝난다.

 

뭐야? 저게 뭐야? 말이 돼? 나는 너무 놀라고 화나고 슬프고 분노가 치밀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분명 내용은 해피엔딩인데, 나는 전혀 해피할 수가 없었다. 

판사가 그걸 짚어줄 수 없다고? 왜?! 남편은 옆에서 길길이 뛰는 내게 판사가 그걸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건 검사와 변호사의 몫이지,라고 침착하게 말한다. 

재판의 방식을 모르지는 않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뻔한 사실조차도 말해줄 수 없다니,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으면 진실을 덮고 드러난 사실만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판사는 뻔히 알면서도 약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그 권위 있다는 재판이란 말인가. 

나는 몰랐다. 검사와 변호사가 쟁점을 다투고 판사가 그 내용을 듣고 판단한다는 것만 알았지, 검사와 변호사가 거론하지 않으면 법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판사가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몰랐다. 이 말도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법을 활용할 능력이 없는 자, 즉 없는 사람은 법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법은 그래도 정의로운 줄 알았다. 하긴 드라마 마지막 내레이션이 그거였다. "법은 불완전한 정의다. 그러나 법을 가르치는 순간, 그 법은 정의여야 한다. 정의롭지 않은 법은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정말 잔인하다. 모르면(없으면) 잘못한 게 없어도 코베이는 무서운 세상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로 잔인한 줄은 몰랐다. 그런 부당한 재판 방식을 아무도 지적하지도, 뜯어고치지 않고 지금껏 유지하다니.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법조계에서 이런 세상의 질서를 고치려고 나서는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막히고 분노스럽다. 




아마도 두 로스쿨생이 살아갈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만든 에피소드였을텐데 나는 드라마 주내용보다 그 에피소드가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어이없어서, 그 정도로 어이없는 것은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을 거 같아서 괜히 인터넷을 뒤적거려보지만 헛손짓일 뿐이다. 

혼자 분노하다 말고 내 마음이 여기 머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수많은 모순을 보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이보다 더 자주 모순에 부딪히고 실망하고 분노했지만 어느 순간 원래 세상이 그래,라고 묻어버리고 살아왔다. 이제 어지간한 것은 놀랍지도 않고 심지어 인지하지도 못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나이 들어왔고 이제는 그런 세상을 물려주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세상이 왜 이모양이야? 왜 이렇다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어?라는 질문은 이제 아이들이 내게 물을 차례다. 나도 몰랐어, 나도 커보니 이모양이었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책임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있느냐, 그렇지는 않다. 책임 있는 나이가 되었을 뿐 권한을 가지지는 못했으므로 그저 한숨을 쉴 뿐이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제 그런 모순을 놓치지 않고 써보려 한다. 기록해두려 한다. 이런 일들은 당신들도 나도 소스라쳐 놀랐던 것 아니냐고, 이제 우리 여기에 익숙해져 버린 거냐고, 다시 물으려 한다. 

그래서 뭐? 모순 하나를 발견하고 그걸 기록해서 뭐? 기막히고 분노스럽다, 로 끝나는 글을 쌓아 올리면 뭐가 된다고?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잊지 않으려고. 계속 소스라쳐 놀라려고.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새삼 세상의 모순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한탄하려고. 그거라도 하려고.

그거라도 같이 하자고.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콩 한쪽이라도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