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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21. 2021

오이

글을 쓴다는 것

오이지를 담그려고 오이 반 접을 샀다. 박스를 열었을 때 오이의 풋내가 훅 나면서 드디어 여름이구나, 계절을 느낀다.      

맨손으로 오이를 집다가 여린 가시가 생각보다 따가워 툭 놓쳤다. 긁힌 팔뚝을 비볐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상처를 느낀다. 오이를 다시 집다가 내려놓았다. 고무장갑을 꺼내기로 했다.      

여름이라 넣어둔 고무장갑을 꺼내며 괜히 웃음이 났다. 기어이 장갑을 꺼내게 하는 오이 가시가 대견해서. 쉽게 툭 부러지는 연한 오이지만 가시를 돋워 자신을 방어하겠다는 그 태도, 그 본연의 저항이 마음에 든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자연은 그냥 내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가슬가슬한 가시로 꼿꼿하게 말한다. 조심스럽게 다뤄,라고.      

고무장갑을 끼고 오이를 물에 퐁당퐁당 담갔다. 더 푸릇해진 오이를 면 행주로 북북 씻었다. 오이 끝에 달린 오이꽃도 문질러 뗐다. 언제 가시를 돋웠냐는 듯 다소곳하게 연한 오이가 되었다.

물기를 말리려고 채반에 쌓아둔 오이를 보면서 이 오이가 아까 그 오이냐, 물었다.  

    

오이를 씻다 말고 메모를 했다. 가시, 꼿꼿, 대견, 순응...

내게는 그런 욕구가 있었다. 스치는 순간을 붙잡고 가만히 매만져 보는 일. 그 만족감이 컸다. 하지만 누군가와 나누기에는 너무나도 사소하고, 스르르 잊어버리기에는 내게 너무 소중했다. 이런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알았다. 이 욕구는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글을 쓰는 순간에 채워진다는 것을. 내가 들어줬어야 할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려고 해서 더 외로워졌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과 알콩달콩 지내는 일이다. 풋풋함이 살아있는 그대로 와작 베어 물어도 맛있고 소금물에 절여 여름내 두고두고 빼먹어도 맛있는 오이를 내려다보며 뭘로 해 먹을까 궁리하는 재미를 누리는 일, 골마지가 끼지는 않았나 노심초사 살피다가 드디어 며칠 만에 꼬들꼬들 잘 삭은 오이지를 냉장고에 쟁이는 만족감을 즐기는 일, 그리고 맞춤한 시간에 적당한 양을 꺼내 갖은양념으로 무쳐 식탁에 올려놓고는 뜨끈한 밥이 입안 가득 들었을 때 오도독 씹힐 그 식감을 기대하며 젓가락을 뻗는 순간의 쾌감을 맛보는, 그 모두를 세세히 기억하고 매번 다르게 기록하는 일이다. 그렇게 오이를 씻을 때부터 아니 오이를 보는 그 순간부터 그 식감과 꼬순 참기름 냄새를 쫓아가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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