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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07. 2021

찬란한 갱년기 이야기

갱년기를 겪으면서 중년과 갱년기에 대한 책을 무작위적으로 읽어보았다. 예전에는 외국작가들이 사회적 의미와 분석을 담은 글이 많았고 지금은 노후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는 독려의 글이 많다. 외국 책들은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우리 사회의 정서와는 많이 다르고, 유용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뭔가 딱히 우리에게 맞는 이야기는 찾기 힘들었다. 특히 나처럼 마땅한 커리어가 없는 사람에게는 허황되게 느껴졌다. 에세이류도 꽤 눈에 띄는데 어떤 것은 너무 성공적이어서 가볍고 어떤 것은 너무 자기치유적이어서 무겁다.   

좀 더 우리 이야기, 좀 더 솔직담백한 이야기, 좀 더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이야기, 특히 나처럼 사회적으로 애매한 포지션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래서 이제 막 갱년기를 겪는 이들이나 우리 딸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싶다.




#장면 1.      

시어머님의 화장대에 진열된 임영웅의 부채와 컵받침을 보았다. 요즘 워낙 핫해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덕후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행사장에 가지 않았다면 가지고 있기 어려운 물건으로 보였다. 오호라, 어머님도 분명 나와 같은 덕후겠구나, 반가웠다. 더구나 장롱 깊숙이 감춰둔 것이 아니라 당당히 화장대 위에 진열해 놓았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손주도 며느리도 오가며 볼 수 있는데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니까. 존경스러워라, 팔순의 당당한 덕질이라니. 그동안 숨죽여 덕질했던 내가 조금 한심하고 무안해졌다(덕주 이야기는 요기 ☞https://brunch.co.kr/brunchbook/geokjil). 책까지 내놓고 무슨 숨죽인 덕질이냐, 대놓고 한 덕질이지 싶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덕질하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한 땀 한 땀 글로 자은 것이니, 숨죽인 게 맞다.     

아무튼 그런 나와 달리 어머님은 언제나 당신의 행동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 없다. 하긴 평소 자식들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분이시다. 당신의 방식을 요구하며 너는 왜 그러느냐는 식의 평가와 질타가 없다.

평생 시계추처럼 공장과 집만 오가는 단순 노동자로 사신 아버님이 자유로운 어머님의 곁을 감당하느라 조금 힘드셨겠다 싶었다. 틀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아버님의 마음이 짠하게 다가왔다. 또한 반대로 정해진 틀 밖에 모르는 아버님을 거스르느라 어머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내가 아는 어머님은 당신이 즐겁게 살기 위한 노력을 막아서는 것을 참지 않는 분이셨다. 그 어떤 방해물도 서슴없이 뛰어넘으셨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닌가 보다.

어머님의 덕질이 괜히 반가워 한창 도라지나물을 무치는 어머님께 다가갔다. 내가 알고 있는 임영웅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드리려는데, 입을 열자마자 어머님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바로 내 말을 반박했다. 아니 나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닌데요, 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바로 알아챘다. 어머님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할까 봐 먼저 쉴드를 치는 것이다. 아이고, 귀여우신 어머님. 어머님 말씀에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그럼요. 그런 사람 아니지요.

어머님도 그동안 당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힘드셨구나. 하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주변의 방해가 있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좋아하는 일조차도 내 뜻대로 하지 못하는가. 한낱 덕질조차도.

어쩌면 어머님도 처음부터 당당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떤 시기, 어떤 어려움을 거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과 양보해야 할 것을 구분했으리라.          

 

#장면 2.

보수적인 내 형부는 언니에게서 처제가 덕질에 관한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덕질이니, 덕후니 하는 말이 어디서 온 말인 줄 아느냐, 그런 오타쿠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은 줄 아느냐 등등. 언니는 시큰둥하게 답했단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뭔 말이 많아.  

나도 안다. 덕질에 좋은 면만 있지는 않다는 거. 이상한 덕후도 많다는 거. 때로 생각지도 못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세상에 어떤 일이 부정적인 측면이 없겠는가. 어디에 확대경을 들이미느냐에 따라 세상의 풍경은 달라진다. 굳이 걱정을 앞세우는 형부의 시선이야 내 마음대로 못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내가 택하련다. 이왕이면 나를 웃게 해주는 것들로.

지금 여기, 나의 삶이 살만해지게 해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다.     

       

장면 3.

기차 안에서 옆좌석 여성이 가는 내내 킥킥거리며 핸드폰을 본다.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느라 흐흥, 흐흥 난리다. 괜히 내 입꼬리도 따라 올라가고 흐흥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도 같이 웃는다. 드디어 그 여성이 만족스러운 탄식과 함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도대체 뭘 보신 거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느라 나도 애썼다.

평소에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느라, 또 알맹이 없는 몸피를 불리느라 가져보지 못한 시간들. 기차를 타고 가는 잠깐의 시간 동안 따뜻한 웃음으로 빈 속을 채우는 모습에 기차에서의 한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내 덕주는 말했다.

“여러분 즐거우세요? 벌써 마지막 곡이에요. 시작한 지 5분밖에 안된 거 같은데 벌써 끝이네요. 두 시간을 5분처럼 보냈으니 여러분은 그만큼 젊어지신 겁니다.”               

사회적 역할이나 명예 또는 아파트나 차 같은 외피를 불리는 시간은 그토록 느리게 가는데 내면을 채우는 시간은 마법처럼 쏜살같이 흐른다. 다행히 그 짧은 시간으로도 우리의 내면은 제법 촉촉해진다.

아, 내면에 대해 사람들은 약간 오해가 있는 거 같다. 무조건 생산적이고 깊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면은 무엇보다 편안함과 따뜻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삶의 고뇌가 생길 때 왜곡 없는 성찰을 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통찰할 테니까. 그러니 무엇으로라도 많이 웃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살아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여겨지도록. 소년 소녀의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려 주변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우르르 에스컬레이터로 향한다. 언뜻 보면 앞만 보고 걷기에 바쁜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르다. 유독 기차 안 여성 같은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혼자의 시간을 누리며 낄낄대기도 하고 어깨를 마주대고 서로 속삭이는 사람도 있다. 여행을 가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행을 챙기는 이들도 보인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에너지가 느껴진다.      


원래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덕질하는 시어머님이 예뻐보이고 웃는 사람들이 좋아보일 만큼 긍정적이지 못했다. 흑백 화면까지는 아니지만 대체로 3도 인쇄한 잡지처럼 그저 그런 색깔이 전부였다. 물론 밝고 진취적인 때도 있었고 나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있다고 자부했으며 만족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성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았고 저으기 비판적이었다. 공주도 아니면서 나라는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되지는 않는다. 그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아직은 성이 견고하지 않았을 테고 그런 나를 지켜줄 성벽이 필요했을 테니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게 인생의 흐름인 것 같다. 어느 시기에는 어떤 성을 쌓을지 고민하고 어느 시기에는 성을 쌓고 어느 시기에는 성을 허물고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지. 그런데 크게 구분하면 성을 쌓기까지와 허물고 나온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바로 그 두 시기를 나누게 된 연결지점, 그때가 갱년기가 아닌가 싶다.      

‘이제 와 생각하면’이라고 했지만 내가 정말 성을 나왔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중에 다시 돌아보면 또 다른 지점이 보일 테니까. 하지만 머리를 빼꼼 열고 나온 것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에게서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적당히 따듯한 온기를 느끼는 것을 보면.

지금은 이렇게 따뜻함을 느끼지만, 성에서 나오기까지 길고 긴 계단을 내려와야 했다. 계단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떠밀리는 기분으로 내려와야 했기에 참담하고 외롭고 괴로워했다.

성 위에서 밖을 내다볼 때는 각자 성 안에 있는 이들도 성 밖을 서성이는 이들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서 몰랐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느 시기가 되면 계단을 내려와야 한다는 것도, 내려오면 더 큰 세상이 기다린다는 것도.

지금 성 위에 선 이들에게, 또는 성을 내려오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성밖에 서서 여기가 어딘지 아직 어리둥절해있는 이들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어주고 싶다. 괜찮다고, 여기도 안전하다고. 꽤 푹신하다고. 어둡고 칙칙하게만 여겨지는 그 시기가 얼마나 찬란한지 조금씩 알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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