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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7. 2021

만약에, 북스테이

만약 내게 집 한 채 지을 땅이 있다면 북 스테이를 하겠다. 마당에는 약간의 고추와 깻잎, 토마토와 호박을 심어야지, 그리고 바질도.     

북 스테이 오신 분들께는 조식을 드릴 건데, 그때그때 텃밭 농작물을 활용해서 반찬을 만들어주고 싶다. 집에서는 밥해 먹는 게 제일 힘든 일이라고 투덜대지만, 손님이 오면 밭에서 난 재료를 가지고 내 맘대로 요리해서 대접하는 게 몹시 즐겁다.      

              

새벽에 일어나 밤새 올라온 깻잎 웃순을 후루룩 따고 아직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꽈리고추 몇 개, 호박 하나를 따와야지. 잔멸치와 양파를 넣어 간장으로 구수하게 깻잎을 볶고, 호박 나박나박 썰어 된장찌개 끓여서, 고추장 말고 된장에 꽈리고추 찍어 드시라고 내어드려야지. 매일 같은 걸 먹는 우리 식구들은 내 식단이 지겹겠지만 손님은 매일 바뀌니까 괜찮을 거다. 건강한 시골밥상 마니아가 생길지도. 주말에는 바질 토마토 치즈 샌드위치가 좋겠다. 빵 위에 생 바질 잎 두어 개를 깔고 치즈 한 장, 토마토 하나를 썰어서 얹는 거다. 바질 한 장이면 아무런 소스 없이도 충분히 감칠맛이 생기더라. 페스토로 만들어 먹는 거보다 훨씬 신선하고 담백하다. 이것도 우리 식구들은 담백해도 너무 담백한 거 아니냐고 항의하겠지만, 손님들은 담백한 거 하루쯤은 좋아하실 거다.                    

글을 쓰고 책을 짓고 싶어 하는 사람 치고 집에 책이 없는 편이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나도 미니멀 라이프를 해보려고 짐을 줄여봤다. 줄여도 줄여도 줄어들지 않아 책을 없애기 시작했다. 서재 도서관(자신의 서재를 주민에게 개방한 도서관)을 하는 분에게 내가 가졌던 책들과 아이들이 보았던 그림책을 모두 기증했다. 이후에 산 책들도 가급적 그때그때 없앴다.    

언젠가 북 스테이를 하면 책을 많이 가지게 될 테니까 책을 소유하고픈 목마름은 그때 해소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갖고 싶은 책으로만 사야지. 손님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따위는 갖지 말아야지. 그러니까 북 스테이의 목적은 책 소유욕과 음식 대접용이다.              

내가 북 스테이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게 뭔지 잘 모르는 남편은, 그럼 나는 술을 만들어 팔아야지, 한다.     

우리 집이 처음 생겼을 때 남편이 처음으로 한 일은 술을 빚는 일이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데다 어느 날 전통주를 먹어보고는 그 맛에 홀딱 반했다고 한다. 당장 전통주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녔는데, 일정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온도도 맞춰야 하고 보관도 잘해야 해서 일단 냉장고가 커야 했다. 작은 전셋집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술 빚기를 드디어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술을 빚으면 집안에 사과향이 나서 좋았다. 누룩과 쌀로 만드는 술에서 무슨 사과향이 나냐고 물으신다면, 사과향이 나서 사과향이 난다고 말씀드리는 거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건 분명 사과향이었으니까.          

당시에 술도가에서 자란 아이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있었다. 아이는 힘들 때마다 술을 보관하는 광에 숨어들었다. 술 항아리를 끌어안고 술 익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느낌이 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술이 익어가면서 항아리가 따뜻해지고 뽀글뽀글 소리가 났는데, 그게 마치 ASMR를 찾아 듣는 것과 같이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술이 어느 정도 익기 시작하면 매일 맛을 확인했다. 딱 알맞게 익어, 오늘이다 싶은 날이 있다. 술을 마시지는 못해도 술맛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딱 그날을 정하는 일은 내가 했다. 술맛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남편이 담근 술은 그동안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야쿠르트나 쿨피스 맛이 났다. 그보다 달고 새콤하고 진한데, 걸쭉한 진함이 아니라 맑은 진함이다. 하루만 지나도 맛이 변해서 취향에 따라 신 것을 좋아하면 하루 더 미루고 단 것을 좋아하면 하루 당기면 된다.           

술맛을 본 사람들은 계를 붓자고 했다. 곗돈을 내고 술을 담가서, 오늘이다 싶은 날 모이는 거다. 하필 그날 일이 있어서 못 오는 사람은 못 먹는 거고, 시간 되는 사람은 실컷, 코가 삐뚤어지게 먹고 가는, 모 아니면 도인 술계 말이다. 이런 일들이 대체로 그렇듯, 술계는 시작도 못 해보고 변죽만 울리다가 끝났다.               

바로 그걸 해보고 싶다는 거다. 술을 담가 오늘이다 싶은 날, 시간 되는 이들이 보여 술 스테이를 하는 거, 남편의 로망인 것이다. 사실 남편의 로망이지, 손님들의 로망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이 있을지 모르겠다. 친구들이야 오겠지. 망했다...          


북 스테이는 책을 실컷 보는 곳이지, 술을 실컷 먹는 곳이 아니라고 하니까, 우리 부부처럼 한 명은 책을 실컷 보고 싶어 하고 한 명은 술을 실컷 먹고 싶어 하는 부부를 위한 공간을 만들면 되지 않냐고 한다. 우리는 매번 이런 식이다. 같은 걸 먹고도 다른 맛을 이야기하고, 같은 음악을 듣고도 다른 기분에 취한다.      

그나마 합의를 본 것은,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기로 한 것.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남편은 시골 노인정에 매일 모여 놀고 싶어서이고, 나는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한적하게 살고 싶어서이다.                 

남편은 뭐해서 먹고살지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등산 오는 사람들에게, 일관성 있게도, 막걸리를 담가서 팔겠다고 한다. 팔겠다는 건지, 같이 마시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김밥을 말아 팔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김밥을 아주 잘 만드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다. 어차피 팔만한 수준은 안 되니 차라리 아주 시골스럽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곳이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재료들, 예를 들면 옻순 장아찌나 호박고지, 수삼 정과 같은 걸 넣어서 막걸리 안주로나 먹을 만하게 말이다. 수삼 정과까지 넣었는데 어째서 시골 김밥이냐고 물으니, 원래 서울보다 시골이 더 고급진 걸 먹는 법이란다. 여수에 가면 나물에도 해물이 들어있는 것처럼.  

근데 왜 하필 김밥이냐고? 남편이 김밥을 좋아한다. 몇 날 며칠을 먹어도 그저 김에 둘둘 말기만 하면 좋단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해서 정한 메뉴다. ‘뭐해서 먹고’ 살지 정한 셈이긴 하다.  

   

아직, 집 지을 땅이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에 더 마음을 두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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