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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28. 2021

이유가 없다

인생에는 이유가 없다. 인간은 이유를 찾는 질문하는 존재이므로 뭔가 감정이 생기거나 큰일이 발생할 때 왜 그런지 골똘히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생길만한 조건이 형성되어서 생기는 것이다.

내가 국카스텐 음악을 좋아하게 된 시기를 떠올려보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 상황이었다. 귀에 소리를 빵빵 틀어놓고 그의 절규를 들으면서 그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그게 좋았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꽉 찬 어떤 경지에 나를 놓아두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의 이유로 국카스텐 음악을 듣는다. 음 하나하나를 찾아 듣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음을 발견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가사를 적어보고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뮤지션의 예술세계를 상상해보거나 내 일과 생활에 예술적 영감을 얻기도 한다.


내가 아는 국덕 언니는 어느 날 그냥 하현우가 좋았단다. 음악을 찾아 듣고 얘는 뭐 이런 노래를 하냐, 했단다. 그래도 좋아서 노래를 듣는단다. 참으면서 듣는단다. 노래는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를 보기 위해 콘서트장에 간다. 그를 본다는 것이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게 좋으니까. 보지 않으면 안달이 나니까. 그가 하는 무엇이든 응원하고 싶으니까. 목소리가 좋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목소리가 달랐어도 좋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특히 감정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좋은 거고 그냥 싫은 거다. 정치적 성향처럼. 어떤 정치성향을 갖게 되면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지지하는 마음을 갖는다. 가끔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더 절묘한 조건의 성향을 찾아냈거나 특정한 경우에 한해 차악을 선택할 때뿐이다. 인정하기 참 싫지만, 사실이다. 민주주의와 토론문화를 중요시 여기고 합리적으로 숙고해서 시민정신에 입각한 선택을 하는 인간이고 싶다. 물론 그런 지향점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은 이유 없이 싫어하고 이유 없이 좋아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쉽지 않다.       


친구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병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병원에 갔다.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자잘한 관절통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발생했다고 한다. 큰 병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다른 병원에 갔다.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아픈 게 너무 싫다고 한다. 당연히 아픈 게 좋은 사람은 없다. 아프지 않기 위해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거나 침을 맞는다. 조금 나았다가 다시 아팠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왜 오르락내리락하냐고 묻는다. 의사는 왜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알 수 없다. 그 조건을 만드는 건 환자 자신이니까. 의사는 환자의 몸의 변화를 보고 그에 맞는 치료를 할 뿐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처방을 한다. 그 처방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것은 환자다.

누군가는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쉬어야 한다고 한다. 그게 상식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접 동의보감을 보면서 앎을 통해 통증의 원인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 유튜브 등을 보면서 의학 잡식을 늘려가는 사람도 있고 병원 순례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각자 자신만의 원인을 찾아나간다.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만들어간다. 자신만의 방법을 고수한다. 이유는 없다. 내 방법이 더 낫다고 각자 외치지만 더 나은 것도 없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을 선택하고 거기에 의지한다. 부족하다 싶으면 무엇을 해야 더 마음이 편한지 선택해서 추가하면 된다. 사실은 아픈 건 그냥 아픈 거다. 아플 만하니까 아픈 거다.


이혼을 한 사람들은 왜 내가 이혼을 했을까, 고민을 한다. 심지어 왜 이혼을 당했을까 고민을 한다. 왜 나는 불행한가. 행복하고 싶었는데 왜 나는 이혼을 해서 불행하게 되었을까 자책한다.

과연 불행할까. 과연 이혼을 당했을까. 과연 행복하고 싶었을까.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아무도 행복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약간의 불행을 먹고 산다. 이유를 고민할 꺼리가 되어주니까. 만일 정말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자신이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보고 나를 불행하게 막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해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그냥 다니고 집이 불편해도 아파트 값 때문에 그냥 살고 대기오염 때문에 기침을 해도 그냥 서울에 산다.

누구나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 행복의 조건이 하나인 것도 아니다. 수많은 조건들이 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행복하지 않은 거라고 정해버리면 스스로 행복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 기준을 정하는 건 자신이니까.   

   

글을 쓰면서,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서, 나의 욕망으로 스트레스가 크다. 스트레스로 아프고 힘들다. 그 욕망을 버리면 된다. 그런데 욕망을 버리면 스트레스가 없어지는가. 아니,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스트레스가 새로 생긴다. 그럼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괜찮지 않다. 괜찮은 어느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기를 쓴다. 또 그러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대단한 작품을 남기는 게 내 욕망이 아니라는 것. 나를 설명할 한 줄의 문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게 아니라, 무어라고 불릴 만한 이름이 필요한 거다. 당연히 대단한 작품을 남기는 작가가 되고 싶지만 그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선택한 새로운 선택지다. 내가 작품성보다 명예를 더 좋아해서도 아니고, 이 땅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을 남기고 싶은 원대한 꿈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은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조금 아프더라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아플 때는 자잘하게 욕망을 더 낮춘다. 작가가 되지 못해도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좋아, 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욕망을 버리고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의 영혼이 도달할 곳이다.  


인생에는 이유가 없으니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 된다. 대단한 인과관계와 질서가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이 스스로의 안도감을 위해 만들어놓은 안식처 같은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온갖 자연의 법칙, 과학의 법칙 등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래서 그 법칙을 믿는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눈 딱 감고 외면한다.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도 그 과학이 드넓은 모래 위에 겨우 얹어놓은 모래알 같은 거라는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우긴다. 그게 그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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