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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Dec 30. 2021

나를 돌보는 살림

찬란한 갱년기 이야기

글을 쓰며 고독의 시간을 보내자고 했지만 사실 그건 지루한 일상이다. 의미 없는 듯 보이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다행히 우리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어떻게 지층을 쌓아가는지 충분히 보아왔기에 젊은이들보다는 그 지루함을 잘 견딘다. 얼마 전 그림에 대한 내 글을 보고 자신도 나이 먹으면서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는 댓글이 있었다. 사업하느라 바쁘게 살아온 친구 경신도 이제는 그림 그리고 뜨개질하며 살고 싶다는 말로 고단함을 표현했다. 어떤 이들은 취미생활이나 하며 살고 싶은 거라고 치부하지만 나는 예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동안 모든 삶의 에너지를 바깥으로 발산하며 살아왔다. 사회적 성취를 위한 것이든 내 가족을 돌보느라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든 결국 사회를 향해 외연을 넓혀야 하는 일이다. 인생의 전환적 시기가 오면서 우리는 내면을 응시하고 싶어진다. 자신의 감성과 감정이 애틋해진다. 자신에 대한 사랑인 게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예술 아닌가. 그걸 하자는 거다. 글쓰기든 그림이든 뜨개질이든 예술은 혼자 노는 힘을 길러준다.

예술은 치열한 고독 속에서 피어난다. 고독이라고 해서 어둡고 힘든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깊은 고독은 깊은 기쁨을 자아낸다. 무릇 예술은 그렇다.           

               

그래도 지루하다면 일상에 한 점 온기를 보태는 살림을 해보면 어떨까. 살림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니까. 여기서 살림이란 어지럽혀진 집을 치우는 일만이 아니라, 구겨진 자신을 펴는 일이다. 복잡한 세상살이에 지친 내 영혼을 일으키는 일이고, 정직한 내 손과 발을 믿어보는 일이다. 나에게 맛있는 밥을 해먹이고 오늘은 어떤 하루를 살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에피파니를 얻었는지, 내게 축적된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과 나누며 충일감을 얻는 일이다. 말 그대로 나를 돌보고 살리는 일이다.

살림은 삶에 질서를 부여한다. 나는 글이 안 풀리면 청소를 한다. 갑자기 집이 반들반들해지면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청소 중에 뛰어들어와 글을 마저 쓰기도 하는데, 청소를 끝마치지 못한 경우 더 신이 난다. 빨래도 글을 쓰다 말고 한다. 허리에 협착증이 있어서 자주 일어나야 하는데, 집중하다 보면 때를 놓치고 곤경을 치른다. 그래서 책상에 앉기 전에 빨래를 돌린다. 글을 쓰다가 빨래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나면 일어날 시간이다. 빨래를 너는 동안 또 다른 생각이 고인다. 적당한 주기에 맞춰 몸을 놀리고 마음속에 적당한 환기가 일어난다. 청소도 구역을 나눈다. 방 하나에 글과 거실 하나에 그림과 주방 하나에 오, 어머니 어머니 밥때가 되었네요...

             

<밥하는 시간>을 쓴 김혜련 님은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說位)”라고 말했다. "하늘 님인 내게 하늘 님을 주는 것이 바로 먹는 것"이고, 그런 행위는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시는 것” 즉,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라고 한다. 자신에게 위패를 모시듯이 온 마음을 다해 밥을 하고 밥을 먹고 밥이 자신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의 삶을 산다.         

하지만 하루 세 번, 매일 하는 밥은 사실 귀찮은 노동이다. 더구나 그 일을 평생 해온 여자들의 입장에서 밥은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 사무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지옥철에 시달리고 돌아온 몸을 잠시 뉘지도 못하고 밥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인데, 또 밥이라니. 게다가 살림은 사회적으로 가장 평가절하 되어온 영역이 아닌가. 그런 살림을 기꺼이 즐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밥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 돌밥(돌아서면 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너무 자주' '너무 꼬박꼬박' 돌아온다. 예전처럼 있는 밥 있는 반찬으로 대충 먹는 시대가 아니라서 더 그렇다. 세계화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바로 입맛이 아닐까. 입맛은 더 다양하고 고급한 것을 원하게 되었다. 뭐든 내 뜻대로 잘 안 되는 몸이지만 특히 한 치 혀를 만족스럽게 하는 일이 제일 잘 안 된다.       

이제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평생 가족의 입맛을 우선했지만 이제는 내 입맛을 우선하고 내 몸에 맞는 밥상을 차리고 내 시간에 맞춰 먹는다. 그런데 막상 나 하나 만족시키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든지. 반찬 하나에도 너무 많은 재료가 필요하고 재료에 맞춰 음식을 하면 양이 너무 많아 며칠째 그 음식만 먹어(치워)야 한다. 그렇게 대충 끼니를 때우게 되면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고독이 깃들 수 없다.

                        

내가 밥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먹는 것보다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느라 하루가 다 가버리면 그렇게 화가 날 수 없다. 아픈 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하찮은 일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앞선다.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는데, 일상이 도대체 뭐야? 살림하는 일상이 소중하다는 거에 도저히 공감이 안돼, 유영은 투덜거렸다. 유영과 달리 일상이 소중한 것은 알겠는데 도저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폭력상담사의 인터뷰를 보면서 유영이 일상에서 느끼는 간극을 찾아냈다. 그 힘든 일을 어떻게 계속하실 수 있으셨어요? 라는 질문에 일상에서 힘을 얻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밥 먹고 가족과 산책하고 고양이를 만지면서요. 그 상담사는 매일 극한의 아픔을 지닌 이들과 일상을 산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일상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영은 주부로서 바로 그 일상을 유지하는 일을 한다. 가족들이 밖에서 돌아오면 몸과 마음을 뉘이고 쉴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니 유영에게 일상은 살림이고 살림은 버거운 삶이다. 일상으로, 살림으로 삶이 회복되기 힘든 직종(!)인 것이다. 주부는 살림보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 


생의 시기마다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 달라진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루고 (의미있는) 일에 매진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나를 돌보는 일에 매진할 시기다. 그런데 밥때가 '너무 자주' 온다니? 밥은 원래 하루 세 번 먹는 거였고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제때 밥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나? 뭣이 중헌디? 그래봤자 쓰던 글을 마저 쓰기 위해서 또는 하던 일에 계속 몰입하고 싶어서다. 밥벌이를 하는 글쓰기여도 밥이 목적이니까 밥이 먼저고 나를 돌보기 위한 글쓰기도 나를 살리는 밥이 먼저다. 물론 글쓰기란 영혼을 살리는 일이긴 하지만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지 않나. 몸이 먼저다. 이제 밥 먹는 일에 몰입하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 이천식천, 향아설위는 하지 못하더라도 밥먹는 것에 삶의 무게를 두는 것, 그것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나를 위한 예배이며 진짜 살림이다.     

   

머리로 깨달은 것을 몸으로 익히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나를 위한 살림을 하려고 해도 그동안 살림을 하지 않았거나 나처럼 겨우 끼니를 때우며 하루를 모면하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거부할 수 있다. 평생 일만 하던 사람은 일이 제일 쉽다. 갱년기는 쉬운 길 말고 살리는 길을 택할 기회다.

천천히 나만의 살림 방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이 몸에 익을 때까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친구 유영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맛있는 점심 한 끼 사 먹는 것을 소중한 일상으로 여긴다. 유영에게는 친구들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지금 그를 위한 살림이다.     

물론 가끔 평생 일에 매진하고 은퇴한 후 다시 새로운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느라 '혼자' 살림할 틈을 갖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훌륭한 삶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살리는 시간을 갖지 못하다니 안됐다. 개인적으로 좋은 삶을 살고 싶지 훌륭한 삶을 살겠다는 욕심은 없다.         

      

“맨날 진다고 매일이 비극일 수는 없잖아.

웃고 나면 잊기 쉬워져.

잊어야 다음이 있어.”     

오랜만에 아주 마음이 설레는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에서 나오는 대사다. 우리는 이제 일상적으로 실패한다. 잘 먹던 음식을 소화하는 데 실패하고 뚜껑 여는 데 실패하고 키오스크 앞에서 실패한다. 어른이 되면서 성공하는 법을 알았고, 으레 당연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꾸 실패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도전해보지만 매번 스스로에게 배신을 당한다. 하지만 웃어버려야 한다. 잊고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웃고, 일단 웃으면 뇌는 잘도 속는다. 쓸데없는 것에 웃으면 더 신난다. 웃는 것은 영혼을 살리는 방법 중 하나다. 잘 웃기 위해서는 마음을 쏟을 곳이 있으면 좋다. 다행히 인간은 주어진 업무를 꼬박꼬박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를 키운다. 자식을 키우고 게임레벨을 키우고 프로젝트를 키운다. 마음을 다해 키우는데 그게 나를 살린다. 할머니들을 보라. 어느 구석진 곳이든 흙만 보면 씨를 뿌려 작물을 키우지 않는가. 할머니들은 도시에 있는 자식에게 가기보다 평생 호미로 가꾼 내 땅 옆에 있으려고 한다. 인생 굽이굽이마다 사무치던 사연을 땅에다 쏟아부었다. 땅에 엎드린 할머니들을 보면 저분들의 살림이 인류를 살렸지 싶다. 아이돌을 키우고 국민가수를 키우는 덕질도 결국 마음을 다해 내 영혼을 살리는 일 아니겠는가. 때로 살림은 세상과 연결되어 이웃과의 공동체적 연대 같은 더 큰 살림으로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나도 천천히,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려 한다. 정 안되면 베란다에 작은 화분으로 텃밭을 만들어야지. 살림이 갱년기를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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