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라 갱년기
어느 날 가만히 앉아있고 싶어졌다. 그즈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마흔 살 무렵부터 마을활동과 학부모회 활동을 했고 협동조합을 꾸렸다. 주변에서는 한창 아이들이 커가던 시기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냐고, 좀 쉬면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즐거웠고 만족했고 보람 있었기 때문에 딱히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건강한 체질은 아닌지라 자주 아팠고 겨울이면 매번 고비가 왔지만 봄이 되면 다시 활력이 생겼다.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일들을 벌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무리가 되기는 했는지 왼쪽 어깨에 오십견이라고 하는 질병이 왔다. 스트레칭을 잘하지 않은 탓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몸을 풀었다. 자가면역질환이 있었고 건조증이 심하니까 그러려니 했다. 결국 수술을 했다. 몇 년 뒤 다시 오른 어깨도 수술을 했다. 양팔을 쓰지 못하게 되자 아주 작은 것조차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이 쓸모없게 여겨졌다.
그러다 문득, 절에 가고 싶었다. 비 오는 날 쪽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가만히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간절히 그런 순간을 원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곡성에 있는 작은 암자에 갔다. 마침 여름 비가 종일 내렸다. 작은 마당을 둘러싼 대나무 밭에서 솨아솨아 바람소리가 났다. 가만히 비를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춥지 않았지만 방에 군불을 때고 잤다. 산속의 밤이 푸근했다.
그날로 모든 것에 마음을 접었다. 하던 일을 접고 인간관계를 끊고 집안에 칩거했다. 누구는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하고 누구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 했다.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증후군들이 몰려왔다. 밤이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시려 와서 이불을 둘둘 말아 끌어안아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 모든 것이 갱년기 증후군이라는 것을 내가 인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내가 왜 이러나, 불안하거나 나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괴롭고 외롭고 발버둥 치게 아팠다.
아픈 와중에 정말 다행히도 때마침 덕통 사고를 당했다. 한눈팔지 않고 덕질에 온 마음을 바쳤다. 덕질을 핑계 삼아 집에서 유튜브만 보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덕주의 공연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집 밖을 나간 지가 오래라 혼자 가기가 무서웠다. 원래 싸우고 죽이는 영화는 무서워하지만 밤이 무섭다거나 귀신이 무서워 혼자 잠을 못 잔다거나 새로운 일이 시작하는 걸 무서워하지 않았다. 뭐든 하고 싶으면 그냥 해, 아니면 말고 라고 밀어붙이던 내가 대문 밖을 나서는 게 무섭다니. 그런데 진짜 무서웠다. 밤길 운전도 무섭고 사람들 많은 데 혼자 서있을 것도 무서웠다.
동시에 혼자 있고 싶었다. 아이들은 기숙사에 있고 남편과는 주말부부여서 주말에만 가족이 모이는데, 일요일 저녁 가족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살 것 같았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거나 손이 많이 갈 일은 없었다. 그냥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것이 숨이 막혔다. 얼른 혼자 가만히 있고 싶었다.
사실은 삶이 이어지는 게 버거웠다. 죽고 싶었다는 말은 아니다. 죽음 같은 적극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다음날 아침이 텅 빈 채 내게 온다는 사실이 버거웠다. 할 일이 없어서 그래, 신세 좋은 타령이야, 라는 소리를 들었다. 먹고사는 게 바빴으면 달랐을까. 글쎄,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갱년기를 겪어온 우리 엄마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을 새도 없이 바빴는데도 밑으로 뭐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어서 괴로웠다고들 한다. 더구나 여전히 먹고사는 게 힘든 때였다. 아이들이 막 대학에 들어가던 시기이니 뭐라도 해서 그 뒷감당을 해야 했다. 그런데 무책임하게도 다 때려치운 것이다. 살림에 쪼들리고 무능력에 괴로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이기보다 적게 쓰는 걸 택했다.
어느 날, 국밥집에 갔다가 맞은편에서 어느 모녀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내 앞에 남편이 앉았고 앞 테이블에 그 집 딸이 등지고 앉아있고 그 앞쪽에 딸의 엄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가 앉았다. 그러니까 나를 향해 앉은 여자가 하는 이야기가 그 집 딸을 지나 말없이 국밥만 먹는 남편을 지나 그대로 내게 들려왔다. 나는 먹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여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바짝 세웠다. 얼핏 들어도 갱년기로 힘든 여자의 하소연이었다. 시장통의 국밥집은 몹시 시끄러웠다. 그녀는 국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계속 딸에게 푸념인지 투정인지를 쏟아내는데, 들리다 끊기다 했다. 문득문득 들려오던 말을 옮겨보면 이런 거였다. 내 집에서 내가 맘 편히 있을 수가, 아무리 자식이어도 온다고 하면 청소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 혼자면 밥을 먹든 뭘 먹든, 나도 내 맘대로, 가만히 좀 있고 싶어도, 내 집에서, 나도 이제...... 요지는 이제 맘 편히 혼자 좀 있고 싶다는 거였다.
나랑 비슷하시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들 많이 힘들구나...... 훔쳐 듣는 나는 조금 울컥했다.
딸은 별말 없이 국밥을 먹었다. 가끔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등지고 있어 들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말이 딸을 향한 것은 아닌가 보다고 짐작했다. 변명이나 변호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로 엄마의 말을 듣는 걸로 보아 여자의 불만은 다른 자녀를 향한 것인 듯했다.
모녀는 우리보다 먼저 식당을 나갔다. 내 곁을 지나가는 여자에게 파이팅, 이라고 외쳐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봐요, 당신. 나도 그래요. 그래도 당신, 힘내요, 우리 잘해 봐요. 그런 눈길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밥집의 그녀를 시작으로 내 주변에 갱년기를 겪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갑자기 온몸에 관절통이 오게 된 친구 다온이 있다. 다온은 평소 건강했기에 갑자기 아픈 것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다온과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갱년기의 통증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영이 있었다. 그녀도 몇 년 전 심하게 관절통을 앓았고 빈 둥지 증후군과 공황장애로 고생을 했다. 그 외에도 친구, 언니, 동생, 친구의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통증을 시작으로 노년과 죽음, 부부와 결혼생활, 자식과의 관계와 미래, 사회적 관계와 일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걱정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야기의 결론은 자꾸 다행이라고 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났다. 분명 아프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꾸 긍정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