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라 갱년기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죽음으로 다가가는 길에 어떤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 예를 들면 치매나 고독, 경제적 어려움 같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적벽가 중 적벽대전 판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대목 들어보겠는가.
숨맥히고 기맥히고 살도 맞고 창에도 찔려 앉어 죽고 서서 죽고 웃다울다 죽고 밟혀 죽고 맞어 죽고 애타 죽고 성내 죽고 덜렁거리다 죽고 복장 덜컥 살에 맞어 물에거 풍 빠져 죽고 바사져 죽고 찢어져 죽고 흉하게 죽고 우습게 죽고 무섭게 눈빠져서 사빠져 등터져 오사급사(誤死急死) 몰사 악사(惡死)허여 다리도 작신 부러져 죽고 죽어보느라고 죽고 무단히 죽고 함부로 덤부로 죽고 땍때그르르 궁굴다 아뿔사 낙상하야 가슴 쾅쾅 뚜다리며 죽고 실없이 죽고 가이없이 죽고 어이없이 죽고 허망히 죽고 재담으로 죽고 꿈꾸다가 죽고 한 놈은 주머니를 뿌시락 뿌시락 거리더니마는 워따 이 제기를 칠 놈들아 나는 아무 때라도 이 봉변 당하면은 먹고 죽을라고 비상(砒霜)사서 넣드니라 와삭와삭 깨물어 먹고 죽고, 또 한놈은 돛대 끝으로 뿍뿍뿍뿍뿍 기어 올라가드니 아이고 하느님 나는 삼대 독자 외아들이요 제발 덕분으 살려주오 빌다 물에가 풍, 또 한 놈은 뱃전으로 우루루 퉁퉁퉁퉁 나가드니 이마 우에 손을 얹고 고향을 바라보며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나는 하릴없이 죽습니다. 언제 다시 뵈오리까 빌다 물에가 풍 버끔이 부그르르르 또 한 놈은 그 통에 한가(閑暇)한채 허고 시조 반장 빼다 죽고 직사몰사 대해수중 깊은 물에 사람을 모두 국수 풀 듯 더럭더럭 풀며 적극(赤戟) 조총 괴암통 남날개 도래송곳 독바늘 적벽 풍파에 떠나갈 제
전쟁통을 표현하다 보니 참으로 고약하게 죽는 모습을 묘사한다. 소리꾼이 신나게(신나기야 하겠냐만서도 신나게 불러젖힌다고 할 만큼 빠르게 부른다) 불러서 그런지 숱한 아픈 죽음을 들으면서 저들의 죽음에 비하면 우리의 죽음은(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얼마나 편안한 것인가 싶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는 <긴 호흡>에서 죽음을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것이다. 죽음이란 '그걸' 돌려주는 일일 뿐이다. 우주적인 시각으로 볼 때 생명은 아주 특별하고 특이한 일이다. 모든 것들이 죽음의 상태, 즉 무생물의 광물 상태인데 아주 오랜 시간, 인간의 개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억만 년(그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이겠지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수의 단위이다)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연한 결합으로 생명이라는 것이 생긴 거다. 그러니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물리학자 김상욱은 말했다. 그게 기본값이니까. 오히려 왜 갑자기 생명이란 게 생겼을까 궁금해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게다가 그 수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생긴 생명이 바로 나다. 심지어 이 불안정한 생명체가 늙을 때까지 흩어지지 않고 잘도 나라는 개체를 유지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가.
덕분에 나의 필멸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죽지 않고 '힘겹게' 살아갈 것이 두렵다. 불안정한 개체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무엇이라도 되고 싶었다. 흩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함에도 생명체가 된 이상 무엇이라도 되었다가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떨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여자'라는 대사로 마음을 끌었던 드라마처럼 이러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갱년기의 시작을 알렸다. 엄마였던 내가 더 이상 엄마로서의 필요를 요구받지 않게 되면서 나 자신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적 가치는 증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나는 무엇으로 불리고 싶다. 그때만 해도 무엇이 중요했지 무엇으로 나를 벌어 먹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아니 무엇이 되어도 나를 벌어 먹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엇이 된다 해도 단 한 끼도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 그것은 현재의 나의 표상이고, 이후 나의 현실이 될 듯하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매일 시니어 문학상 수상작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나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읽다가 결국 중간에 덮어버렸다. 이 글을 쓰신 이순자 님은 배울 만큼 배웠고 경력도 있고 자격증도 많다. 그런데도 한순간에 삶은 그렇게 무너져 버렸다. 누구라도 이순자 님처럼 한순간에 원치 않는 삶에 가 있을 수 있다. 과연 무엇으로 이 불안을 덜 수 있을까. 가진 돈이 많으면 괜찮을까? 어느 정도 많으면 될까? 이순자 님도 경제적으로 전혀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하는데? 가족이 있으면 괜찮을까? 가족이 오히려 준비해놓은 노후자금을 탕진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그동안도 대단히 경제적 능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제는 그 자신감이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전에 나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감이 있었던 걸까. 일단 세상이 달라져 버렸다. 움켜쥐고 있던 자격증이나 작은 경력, 50년간의 삶의 경험 등이 아무 소용없어졌다. 한 번은 큰 마음먹고 대학원에 가기로 작정을 했다. 그쪽 분야에 이미 진출해서 활동 중인 친구에게 먼저 말했다. 하루빨리 대학원에 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 종용했던 친구다. 친구는 우선 나의 용기를 치하하더니 작금의 현실이 어떠한지 알려주었다. 시장이 순식간에 변했다는 것이다. 그 변화란 바로 나이 제한이다. 예전에는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말을 할 수만 있으면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이제는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졸업하자마자 바로 은퇴할 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따놓은 자격증도 마찬가지로 무용지물이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화 사회의 문제로,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정책을 시도하고 다양한 사례 연구도 하고 있다. 덕분에 노후를 대안적으로 사는 이들에 대한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알고리즘을 통해 시니어 마을, 한집에서 따로 또 같이 사는 사람들, 같은 시니어지만 더 나이 든 시니어를 돌보면서 상생하는 이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이들이 경제적인 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의 궁금증은 오로지 그것뿐이어서 사회적 의미니 하는 것들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스스로 독립할 수 있어야 따로 또 같이 살든 상생을 하든 할 수 있다. 나중을 위해 돈을 모으는 것보다 한 달에 50만 원이라도 벌 궁리를 하라는 것이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남편과 나는 어떻게든(여기서 '어떻게'란 더 아래 지역으로 내려가는 걸 말한다) 작은 땅을 살 계획이다. 마당에 작은 텃밭을 해서 먹거리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 한다. 뭘 해서 50만 원을 벌지는 몰라도 아마 종자나 모종 등 농사비용과 핸드폰 비용으로 나가겠지. 노인의 삶에서 통신비용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다. 요즘처럼 코로나 시국에는 핸드폰이 필수다.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핸드폰은 주민등록증처럼 나라에서 책임져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핸드폰 비용에 따른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어디서? 우리 집 안방에서. 부부가 안방에 앉아서 모든 것을 스마트폰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규탄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촉구하는 게 일이다. 참 지질하다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우 현실적인 국민으로서의 권리 주장이다.
이렇게 아직은 남편과 함께다. 아직은 기댈 누군가가 있다. 아직은 글을 써서 50만 원을 벌겠다는 꿈을 꾼다. 아직은 텃밭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다.
또 하나 남은 두려움, 바로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고 수시로 깜빡깜빡 잊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한 사건이 통째로 기억나지 않은 적도 있다. 어느 해 큰댁에 가서 큰어머님은 어디 가셨어요? 물어보려는데 뭔가 싸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물었더니, 돌아가셨잖아, 라는 답을 들었을 때의 그 오싹함이란. 답하는 남편도 듣는 나도 멘붕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큰어머님의 장례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남편은 치매에 좋다는 온갖 영양제를 주문한다. 치매에는 책 읽고 글 쓰는 게 훨씬 좋대, 라는 말 한마디에 글쓰기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마음만 먹었다...
중년들은 치매를 두려워하지만 우리보다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치매보다 신체장애를 더 두려워한단다. 정신은 있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얼마나 답답하겠냐는 것이다. 자식들도 누워있는 부모는 신경을 덜 쓴다. 안전하기 때문에. 그러나 치매는 주변이 힘들기는 해도 본인은 차라리 낫다는 게 어르신들의 말씀이다.
친구 유영도 몸이 너무 아프면서 차라리 치매에 걸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가족이고 뭐고 자신이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망가지면 그 괴리감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한다.
친구 L은 시어머니가 초기 치매였다. 치매는 꾸준히 움직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L의 시어머니는 전혀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밖에 나가는 건 고사하고 집안에서도 억지로 시켜야 조금 걷고 다시 일으켜봐야 금세 소파로 가버렸다. L은 거실 열 바퀴를 돌아야 식사를 드렸다. 드시고도 열 바퀴를 돌아야 방에 가서 누울 수 있게 했다. 하지만 L의 시어머니는 다 필요 없으니 제발 그냥 이대로 살다 죽게 놔두라고 하소연을 했다. 나는 그 하소연을 들으며 친구보다 어르신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정신을 놔버리고 싶을까. 치매를 막으려는 노력은 누굴 위한 것일까. 모시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당연히 치매를 막고 싶겠지만 어르신은 자신의 삶과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외친 김영하의 글처럼. 이상하게 그 뒤로 치매가 조금 덜 걱정되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어쩐지 두려움보다 안쓰러움이 더 커진 듯하다.
<선배 시민>에서 유범상, 유해숙은 시민권을 말한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소득, 의료, 교육, 주택, 돌봄 등의 영역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줄 존재의 이유가 있다"라고 한다. 시민으로서 빵과 장미를 요구하는 것은 '늙음이 추가된’ 시민인 노인의 권리다. 따라서 선배 시민으로서 당당히 시민권을 요구하고 시민권을 높이는 실천가가 되자고 한다.
또한 인간의 삶은 생존을 위한 노동에만 있지 않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프레인의 저서 <일하지 않을 권리>를 인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것도 권리 주장의 하나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도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한다. 노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활동이고, 작업은 학문이나 예술처럼 자신을 표현하고 남기기 위한 활동이며, 행위란 정치적 존재로서 공론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거나 각종 시민단체 등에 참여하는 일이다. 또한, “일은 자기 보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도 노동은 아니지만 작업으로서 중요한 인간의 활동이라니, 아, 반자본이나 탈자본까지는 실천하지 못하지만 일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정도는 실천하며 살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나는 그동안 노동 중심 사고에 사로잡혀 노동을 하지 않는(내 입장에서는 건강 때문에 노동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삶에 대한 자책이 항상 있었다.
불행히도, 아직 현실의 노인은 배가 고프다. 시민권이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열심히 시민권을 획득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