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견디는 방법

찬란한 갱년기

by 천둥

고독을 통해 충만해진다고 했지만 충만해진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그저 참는 것이다.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면,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언젠가 공중화장실에서 글쓰기 모임 광고를 본 적이 있다. 함께 글쓰기 하실 분 모집! 이런 식이 아니라 꽤 길게 사연을 적어놓았다. 요약하자면,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해서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 사회에 나와보니 정작 필요한 것은 글쓰기 능력이더라, 회사는 온통 문서로 말하고 심지어 사적인 커뮤니티조차도 글쓰기로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인생은 결국 글쓰기로 귀결되니 함께 글쓰기 공부를 해보자, 뭐 이런 거였다. 구구절절 너무 공감이 가는 걸 봐서 그 사람은 글쓰기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물론 내가 글쓰기를 권하는 이유는 화장실에도 붙어있는, 인생은 글쓰기로 귀결된다는 결론 때문은 아니다. 생의 대부분을 사람들과 관계하며 복작대다 보면 어느 날 그게 넌덜머리가 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는데 사는 것은 오죽하랴. 그러니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생각난 것은 생각난 대로 내버려'둔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건 인간이 아닌 도인의 영역이다. 그러니 뭐라도 하기는 해야 하고 아무와도 관계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평등하다.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더 이상의 준비물이 필요 없고 글자만 알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게다가 글쓰기는 결국 사색과 이어진다.

후배 인선은 아직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린다고 한다. 여전히 불같은 사랑을 꿈꾸며 사랑이란 모름지기 불같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인선에게 사랑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글쓰기를 시작하라고 했다. 기다리는 왕자가 어떤 모습일지, 어떤 식으로 만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쓰기 시작하면 술술 써질 것이니 당장 쓰기 시작하라고 말이다.

구원 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고독의 시간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단련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멋진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나 자신보다 나를 잘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선은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어 언제나 글을 쓴다. 하지만 내가 권하는 글은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들여다보는 글이다.

예전에 학생상담 학부모 봉사단을 한 적이 있다. 첫 교육시간에 한 학부모가 남편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었다며, 자신도 학생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강사는 그러다 남편이 당신을 떠나거나 미워하게 되면 어떡할 거냐고, 다시 결핍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 학부모는 자기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강사는 스스로 자신을 채우면 잃을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라고 했다. 다시 말해, 상담은 내담자의 결핍을 채워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결핍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잘못하면 어쩌다 만나는 학부모 상담가에게 지나치게 기대다가 오히려 상실감까지 보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만일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누군가에게 개입하고 싶어진다면 자신의 결핍이 투사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누구나 최애 결핍이 있다. 가끔은 삶을 추동하기도 하지만 살아오는 내내 그것으로 인해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최애 결핍은 최애라서 젊은 날에는 누군가에게 투사하려고 기를 쓰고 나이 들어서는 자신에게만 투사하려고 기를 쓴다.

문득 돌아보니, 누구를 만나도 내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가 아니면 재미가 없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뻔했다. 나의 결핍, 나의 불안이다. 목소리 큰 인간들이 자기들 결핍을 이야기하느라 내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날의 만남과 대화가 모두 짜증스러웠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살아왔다. 먹고 사느라 남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식을 키우느라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내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다. 내 결핍도 소중하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그동안 용케도 적당히 숨기고 다독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갱년기로 인해 삶 자체가 불안해지면서 아예 대놓고 그걸 꺼내 든다. 내 불안이 전부 그것 때문이라는 듯이. 아니, 그거여야만 한다는 듯이. 불안의 실체가 새로운 것일까 봐 또 불안해하면서.


최애 결핍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떼를 썼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감정의 정체를 찾아 이름을 달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거나 떠오르는 대로 메모했다. 한두 줄 적어놓고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전 메모장을 뒤지고 책상 위에 쌓아둔 지난 일기장과 책들을 들춰보았다. 그러다 바깥을 내다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있었다. 이거 참 시간 보내기 좋은 일이로구나 싶었다.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옛날 어른들이 허구한 날 추억을 끄집어내어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게 너무 싫었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쓰는 시간보다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다. 추억하는 거, 의외로 괜찮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돌아보니 지나치게 지난날들을 미화하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미화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 고통에 처해있었으니까.

애 업은 나를 보며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그때가 좋은 때다, 툭 던졌다. 그렇게 좋으면 집에 가서 손주나 봐주시지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삐죽 댔다. 아이들이 다 큰 지금, 가족들과 무슨 얘기 끝에 우리 애들이 어릴 때 잘 자서 참 편했다고 했더니 어머님이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거짓말도 잘한다. 어? 진짜예요, 어머님. 나는 어리둥절했고, 그래 그랬겠지, 어머님은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어르신들은 기억을 미화하는 게 아니고 삶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힘든 시절에도 힘들기만 한 게 아니고 좋은 시절에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각인된 기억은 하나뿐이지만, 추억으로 떠올리면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한다.

글을 쓰면 나도 모르던 다른 감정들이 밀고 올라온다. 징징거리고 울분을 터트리던 시작과 달리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순응하고 툭툭 털게 된다. 희한하게도 다 쓰고 나면 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분노했는지 잊게 된다.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이 말한 '자아 벗겨내기 unselfing' 상태가 아닌가. 머독은 눈앞에 황조롱이를 보는 순간 자신이 느낀 분노와 불안을 잊게 된다고 했는데, 우리는 글쓰기를 하는 동안 글쓰기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최애 결핍마저 추억으로 만들어버리고 어쩌면 조금은 철학까지 하게 해 준다.


최애 결핍을 글로 쓰면 만나는 사람마다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자신만 봐달라고 보채는 노인이 되고 싶지는 않다. 글 쓰는 기간 내내 실컷 아프고 외롭고 힘들다고 찡얼거리고, 으스대고 자랑질하고 뻔뻔해지다 보면 스스로를 연민하고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가려진 욕망이 말간 얼굴을 내밀 때까지 쓰고 또 써야 한다. 운이 좋으면 출판으로 이어질 수 있고 독자들과 또 내 이야기를 신명 나게 떠들 수 있다. 사실 출판까지 이어진다면 꽤 깊이 있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보낸 후라서 계속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같은 결핍을 가진 독자들을 위로해줄 비밀 무기를 하나쯤 갖게 될 것이다.

나의 구원자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글쓰기는 자신을 구원할 최고의 방법이다. 근원적으로 나의 욕망을 인정해주고 나의 감정을 지지해주면서 나를 살뜰히 돌볼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최애 결핍을 마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평생 만지작거리며 결핍 뒤에 숨어 살아왔는데 온전히 마주하고 직면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글이란 사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쓰다 보면 어느새 그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그곳에 닿아있다. 그 시간을 벼려 자신을 들여다보고 결국은 세상과 화해하게 된다.

음식 하는 것을 좋아하는 유영은 갱년기를 맞아 요리를 배우러 다녔다. 식초 담그고 술을 담그며 발효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식초는 많이 쓰이는 것이 아니니 만드는 대로 보관할 자리가 필요했고, 술은 마시지 못하니 남들 주기 바빴다. 게다가 어깨도 아프고 무릎도 아픈 유영이 하기에는 버거웠다. 발효를 시키려면 항아리를 사용해야 하는데 아무리 작은 항아리라도 손목에 무리가 갔다. 결국 유영도 만날 때마다 아픈 얘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유영에게도 글쓰기를 권했다. 살아온 대로 살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살려면, 아니 더 이상 살아온 대로 살아지지 않는 몸으로 살려면, 그동안 살던 방식을 내려놓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유영이 해왔던 요리 이야기, 술 이야기, 식초 이야기를 쓰는 거다.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지혜로 변환하는 거다. 글쓰기는 자신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지혜를 끄집어낸다.

유영의 엄마도 요리를 좋아하셔서 평생 식당을 하셨는데, 지금도 자식들에게 식당을 내달라고 조른다. 몸이 건강하면 괜찮지만 일생을 힘든 일만 하신 분이 건강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자식들을 불러서 뒷바라지를 시키고 병원 순례까지 시킨다. 살던 방식을 내려놓지 않으면 혼자만 힘든 게 아니다.

유영은 글쓰기가 부담스럽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자신이 보는 것도 창피해서란다. 왜 그렇게 글을 근엄한 것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 쳐다만 보는지 모르겠다. 실제 베스트셀러들은 가볍고 발칙한 거 투성이인데. 나는 유영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은 입말 그대로 글을 쓴다. 당연히 비문이 많고 맞춤법도 엉망이다. 그런데 그 입말이 너무 생생해서 좋다. 마치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내게 손봐달라고 해서 가끔 수정하기도 하는데, 그 입말의 개성까지 바꾸지는 못한다. 글에는 한 사람의 정신과 삶과 일상이 온전히 담겨있다. 아무리 고치고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글의 매력이다. 우리는 더 다양한 글과 삶을 읽고 싶어 하면서 왜 베스트셀러 작가에게만 글을 허용하는가. 비슷한 내용의 일일드라마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도 여전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각각의 삶의 이야기는 너무나 다양하고 독보적이고 그 자체로 소중하다. 개인적으로 더 많은 에세이가 나와서 더 많은 삶의 이야기가 읽혔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쓰기를 부담스러우면 우선 일기를 쓰면 된다. 초등학교 때 썼던 대로, 나는 오늘 00을 했다 재미있었다,라고 쓰기 시작하면 된다. 쓰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징징대는 글쓰기를 하는 거다. 실컷 징징대고 나면 어느 순간 징징대기를 끝내고 절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본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지 않는가. 아무 의미 없는 인생에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대단한 의미는 아니어도 된다. 내가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면 된다. 허무한 감정으로 가득한 갱년기는 기어이 그 이유를 찾아내는 조건이 되어준다. 그럼에도 일기라 하지 않고 글쓰기라 말하는 이유는 조금은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균형 있는 글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이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자기만의 시선을 갖기 위해서다. 글쓰기는 확장을 일으킨다. 더 이상 남들 붙잡고 하던 신세타령하던 사람이 아니라, 삶의 이유를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사실 글쓰기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부담스러운 거다. 자기가 쓴 글이 창피한 게 아니라 자신을 믿지 못해서 남의 사고로 나의 삶을 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쓰는 거다.


굳이 글로 써야 하나,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반문할 수 있다. 써야 한다. 생각만 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 했던 말도 잊어버리고 조금 전에 썼던 낱말도 기억나지 않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떠올랐다가 흩어지는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몸으로 꾹꾹 눌러써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다. 마음이 곧 언어, 말이 된다. 말은 곧 행동이 되고 삶이 된다. 내가 살아온 삶을 언어로 변환 시키노라면 어느새 감사를 담아 삶을 수용하게 된다. 이때의 나는 꽤 멋지다. 아름답다. 잘 다독이고 돌본 티가 여실히 난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혼자 놀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늙어간다는 것은 혼자가 되어간다는 거다.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함께 세월을 보냈던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혼자만 남겨진다. 나를 떠받쳐주던 세상이 사라지고 혼자 기억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힘들어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어야 늙어가는 것이 덜 두렵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의한, 자기 자신을 위한 놀이다. 물론 다른 예술도 좋다. 다양할수록 더 좋다.


읽고 산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걷다 보면 떠오르는 생각을 흘려버리지 말고 곧바로 써야 한다. 쓰고 읽는 행위가 치매를 예방한다는 연구결과는 단지 노화와 정신건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부지런히 읽고 놓치지 않고 바로바로 쓰려면 몸이 쉴 틈이 없다. 때로 쏟아져 나오는 생각을 받아쓰느라 바쁘다. 고독하지만 심심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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