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권태가 막아설 때

찬란한 갱년기

by 천둥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면 그다음은 뭐가 있을까? 자신의 영광에 드러누워 잠들면 될까?.. 아니면 유산을 관리하듯 성공도 관리해야 할까?(중략...)

목표를 달성하고 임무를 완수한 상태는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거기엔 묘한 우수도 깃들어 있다. 안식처를 이미 찾았기에 방황은 끝났고, 이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안온한 슬픔이라고 할까.”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갱년기가 오면서 더 이상 살 이유를 잃어버린 건 임무를 완수한 탓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는데 굳이 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심드렁해진 거다. 상실감과 회피, 권태의 상태다. 현재를 살아가면서 할 일이 없다니 팔자 좋은 소리다 싶겠지만 거기에는 곡진한 서글픔이 배어있다.


친구 유영도 마찬가지다. 심드렁하다 못해 아무것에도 화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득도한 줄 알았단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브뤼크네르의 말처럼 지지부진한 삶이 싫었던 거다. 그동안 힘껏 달려온 관성대로 쭉 달려 나가고 싶은데 갈 길을 잃어버린 거다. 인생이란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인 것 같다.

유영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그동안 아이들 키우며 사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제는 마음껏 원하는 것을 하라는데, 원하는 게 뭔지 까마득해서 오히려 그 말이 더 상처가 된다. 뭔가 하고는 있지만 왜 하는지 모르겠고 웃고는 있지만 딱히 사는 게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닌데 원하는 거라니. 유영은 애꿎은 딸만 붙들고 질척인다. 딸은 독립할 준비를 하는데, 엄마가 되어가지고 가족이 굳이 떨어져 살아야 할 만큼 대단한 일이 뭐가 있냐고, 곁에 있으라고 옷자락을 붙든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요즘 같이 청년들 뼈골 빼먹는 세상에 굳이 나가서 꿈을 펼치라고 등 떠미는 게 맞나 싶은 것도 사실이다.


유영은 어릴 때 착한 아이였다. 엄마가 너는 착하니 사회복지과에 가라고 해서 갔던, 순한 아이였다. 나중에야 그것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였다는 걸 알고 평생 뿌리치려 애써왔지만 결국 가족을 위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유영은 원래 밥하고 살림하는 일 말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과거형이다. 그런데 의미를 추구하면 할수록 삶에서 의미는 자꾸만 멀어졌다. 이제는 다 내려놓았고, 의미 같은 거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의미 없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뜻이 포함된다는 건 몰랐다. 충분하다는 건 어떤 걸까? 충분이라는 건 필요라는 게 전제되어야 하는데, 유영에게 지금 필요, 욕구, 기대와 같은 단어는 너무 멀리 있다.


아무것도 하기 싫던 날, 나는 내 것을 가지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은 강렬히 특별한 것이 하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특별한 것이 있을 리가 없어서 하릴없이 손에 닿는 것들에 내 이름을 붙여보았다. 굳이 내 이름이 쓰인 스티커를 마련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열 개만 붙여보기로 마음먹었다. 핸드폰, 가방, 옷, 신발... 아무리 둘러봐도 딱히 없다. 냄비, 수저, 화장품... 매일 가족들도 같이 사용하는 것에도 붙이기로 했다.

내 이름이 쓰인 스티커를 들여다보면서 소중한 것이 열 개나 된다고 마음을 달랬다. 친구 아들 녀석이 어릴 때 짜장면을 맛있게 먹다 말고 우왕, 운 적이 있다. 같이 먹던 사람들이 당황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울먹이며 하는 말, 짜장면이 자꾸 줄어, 엉엉. 먹으니까 줄지, 와하하하 웃었지만 그 울음이 못내 부러웠다. 먹을 것에 대한 넘치는 행복감과 내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진 거니까. 그 정도까지는 될 수 없겠지만 나도 내 이름이 붙어있는 연필을 챙기고, 내 이름을 붙일 냄비를 사고, 내 이름이 붙어있는 핸드크림이 줄어들 때 아쉬움을 느끼려 노력했다.

이름은 때로 나를 설명하는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무엇으로 내가 살아지는지, 무엇을 공유하는지, 무엇을 소중히 하는지. 내 시간, 내 감정에도 이름표가 붙기 시작했다. 이제 이름표는 다만 이름표가 아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서 감정이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구체화된 감정은 이름이 불리는 것으로 제 소임을 다했는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이름표 열 개도 채우지 못했는데, 2백 개가 넘는 글을 만들어냈다. 글이 하나씩 쌓이면서 충분과 필요, 기대도 조금씩 쌓였던 것 같다.


한 단계 더 나아가기로 했다. 작가 정혜윤은 <슬픈 세상에 기쁜 말>에서 ‘아더 사이드’라는 표현을 쓴다.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날 작가는 돌고래와 바다거북을 보러 보홀 섬으로 간다. 멀리서 보이는 “돌고래는 너무나 돌고래여서” 돌고래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 돌고래인, 다른 것일 리가 없는 온전한 생명체”를 보면서 작가는 “나도 내 삶의 형태를 갖고 싶다.” 그리고 바다거북을 보러 가게 되는데 선장은 ‘아더 사이드’로 향한다. 한참을 달려 딱 한 마리를 발견했다. “거북은 아주아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다는 까마득하게 넓은데” “그곳에서 거북이를 기다리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바다거북은 그렇게 열심히 움직였을까? 작가는 “그렇게 머나먼 고독의 냄새를 풍기”는 거북을 바라보며 아더 사이드를 생각했다.

우리에게도 ‘아더 사이드’가 필요한 때가 왔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하고 알게”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길, 방식, 목표, 나를 구성한 세계에서 벗어나 아더 사이드를 기웃거리는 시간이 바로 갱년기다.

내게 아더 사이드는 덕질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덕질은 현세와는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현세에서는 갱년기로 풀 죽은 중년이지만 덕질 세계로 가면 통통 튀는 못 말리는 덕후가 될 수 있었다. 풀 죽었다가 통통 튀다가 다시 풀 죽었다가 통통 튀다가, 점차 현세에서마저 통통 튈 에너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덕질은 이전에는 몰랐던 글 쓰는 나를 발견해주었다.


그다음 단계는 내 주변의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우연히 내 브런치에 ‘나의 그녀’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추억을 담는 글 정도였다. 그런데 나의 그녀들이 끝도 없이 떠오르는 것이다. 나를 지탱해준 그녀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솔직하게 말하면 ‘내 사람’이 없다고 느끼던 때였다. 외로웠고 힘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외롭고 힘들었던 나날 동안 내가 의지한 건 그녀들, 내 사람들이었다.

브뤼크네르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 섬으로 돌아간 오이디푸스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스의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디의 시, 이타카를 소환한다. 바로 나도 그랬다. 나는 덕질하면서 이 시를 알게 되었다. 덕주가 너무나 사랑하는 시다.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고 그대는 늙은 뒤에 비로소 그대의 섬에 도착하는 것이 낫’다는 글귀 앞에서 한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갱년기는, 늙은 뒤에 비로소, 늙도록 오래오래 천천히 살아가기 위해 잠시 멈추는 시간이구나, 깨달았다. 흔들리는 마음도 흔들리는 체력도 흔들리는 영혼도 흔들리는 세월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잠이 안 오고, 열이 오르내리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아 이불을 구겨 넣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적응하게 될 것이고 남아있는 날들을 향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읽은 수많은 글귀들 속에 ‘길 위에서 우리가 더 풍요로워’질 거라는 말이 없었을 리 없다. ‘움직이는 상태가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수없이 듣고 또 들었던 말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어떤 이의 말이 마음을 움직인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고 같은 메시지를 담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또 쓰고 읽는 이유는 어떤 글이 어디서 어떻게 와닿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갱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도 갱년기로 힘들 누군가에게 어쩌면 가닿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유영에게 이름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더 사이드를 찾아 공간을 이동해보라고 했다. 공간을 이동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여행이지만 굳이 대단한 여행이 아니어도 된다. 자주 걷던 거리나 카페, 익숙한 사람, 항상 읽어오던 분야의 책을 벗어나 조금 낯선 길로 들어서면 된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아무 데나 내려서 최대한 오래 머무르거나 낯선 동네에서 낯선 강의 들어보는 건 어떨까. 아니 같은 곳에서라도 낯설게 보려는 시도를 하면 된다. 거기서 유영이 자신의 다른 얼굴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유영에게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해줄지도 모른다. 조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낯선 공간에 발을 들일 작은 용기, 어색하겠지만 다른 측면의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용기를 아주 조금만 내면 된다. 조금 버거우려나. 그럼 익숙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써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다. 일단 시작만 하면 바닥으로 끌려가던 무기력이 주춤해진다.

갱년기는 인생을 전환하는 시기이다. 전환적 시기를 맞아 전환적 세계관을 가지라는 인생이 주는 또 하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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