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로 살아갈 것

찬란한 갱년기

by 천둥

-불안증이 도졌어...

유영이 말했다. 등이 아파서 한의원에 갔더니 신장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단다. 신장 검사를 해서 수치로 나올 만큼 심한 건 아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 정도는 안다. 다만 유영은 몸의 변화에 민감한 것이다. 그동안 기능의학과에서 먹었던 수많은 영양제 때문일까 의심했다. 유영은 갑상선 수술 후 아무리 칼슘을 많이 먹어도 수치가 정상으로 올라가지 않아 칼슘 용량을 급격히 늘렸다. 새로운 발병은 언제나 불안을 몰고 온다. 아프면 병원 가서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으면 낫는 몸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겪는 몸의 변화와 통증은 의사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의사도 어찌하지 못하는 걸 뻔히 지켜봐야 할 것이 불안한 것이다.


-별 문제없을 거라고 했는데...

-의사들이야 당연히 별 문제없게 치료하지. 문제는 우리 몸이야. 우리 몸이 평균치에 못 미치니까 의사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거야. 의사에게 기대기는 해도 전적으로 의사를 믿으면 안 돼. 우리 몸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야.


의사들이 들으면 기절할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들을 수없이 겪어왔다. 엊그제만 해도 그랬다. 별문제 없이 맞던 침이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염증을 일으켰다. 한의사는 일시적으로 금속 알레르기가 생긴 거라고, 아무리 면역력이 떨어져도 염증을 일으키는 사람은 못 봤다고 하지만, 며칠 전 내 손톱으로 살짝 긁힌 상처가 덧나 기어이 후시딘을 바르고서야 나았기 때문에 나의 면역력 문제일 것이라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침은 안전한 것이지만 남들에게는 안전한 것이 내게는 때로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내가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나의 전문가다.

-영양제를 끊어야 할까?

의사와 상의할 문제를 유영은 나와 상의한다. 의사의 답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글쎄, 영양제 때문은 아니겠지만 오래 먹은 건 사실이니까 잠시 끊어보는 건 어때? 어쩌면 트리거가 되었을 수는 있는 거니까.

-영양제 때문이 아니라면 왜 신장이 나빠졌을까?

-영양제를 먹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나이에는 누구나 신장이 나빠질 수 있는 거잖아.

-그건 그래...


유영이 괜히 과거를 후회하고 자신을 탓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난 걸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은 영양제라도 자연산이 아닌 대부분의 것들을 제대로 소화시키기 어려운 우리 몸을 생각하면 말이다. 힘드니까 이제 좀 그만 먹지, 하고 몸이 미리 알려준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불안증이 도졌어...

유영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번에는 내 문제를 꺼냈다.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지가 언젠데, 이대로는 비전이 안 보여. 밤마다 불안이 찾아와. 아마 새해라서 그런가 봐.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다. 그런데 얼마 전 계약한 그림책을 엎어버렸다. 도저히 내 실력으로는 마무리할 수 없었다. 이제 어쩔 것인가. 그림책 작가 양성과정 같은 걸 다녀볼까 궁리하면서 더욱 그랬다.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몸은 비명을 지를 것이다. 뻔히 앞날이 보이는 데도 해볼까 고민하게 되는 건 어쨌든 한 권이라도 내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 거짓말에 속지 마.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 한 권 만들면 두권 만들고 싶고 그림책 작가가 되면 또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을 거야. 그림책 작가 천둥 말고 그냥 천둥으로 충분해.

친척의 결혼식이었다. 외삼촌이 언니와 나를 다른 친척에게 소개하던 중에, 언니는 둘쨋집 둘째이며 고등학교 교사라고 대학원 이력까지 자세하게 덧붙여놓고 나를 소개할 차례가 되자 둘쨋집 셋째라고 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자주 있었던 일이다. 그동안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잣대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넘어가지지 않았다. 나도 남들에게 소개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이유들도 많지만 그날 그 순간이 트리거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근데 하필 작가를 택했을까. 작가는 누군가에게 소개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게다가 내가 작가라고 소개된들 과연 나는 만족스러울까. 상대방이 작품은 보지 않고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거나 또는 작품을 보았다고 해도 작품과 무관한 질문만 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만일 교사였다면, 그래서 교사라고 소개되었다면 과연 나는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직업으로 정의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건 직업이나 소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면에 불이 켜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내 영혼을 달굴 것인가?


노년에는 새로운 도전이 어렵다는 편견을 뛰어넘자고 한다. 긴 백세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 세대부터는 제2의 인생이 필수라고 한다. 다양한 노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자고도 한다.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었다. 뒤늦은 도전이어서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지만 과연 정말 도전만이 아름다운가. 과연 도전이 성공과 성취로 이어져야 하는가. 과연 몸이 도전을 허락하는가. 몸을 떠나 정말 성취하는 삶을 원하는가. 다시 성취하는 것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가. 삶의 방식이 도전뿐인가. 도전은 성공 또는 실패라는 결과를 패키지처럼 끌고 다닌다. 그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존재로 살면 안 될까. 열흘 정도 누군가의 인생을 빌려 살아보는 <어쩌다 사장>처럼 평범하지만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삶, 잘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벗어나되 조금 설레게.

인간의 삶은 욕망하거나 권태롭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이 염세주의자는 욕망과 권태 두 가지 고통을 오가다가 찰나의 한순간 고통을 잊기도 하는데 그때에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욕망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젊은 날에는 욕망하는 것이 미덕이 되기도 했다. 나를 다그치는 시간을 통해 더 나은 내가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욕망은 위험하다. 다그치는 것은 더 위험하다. 헛된 욕망은 몸을 망가뜨리고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권태를 택할 수도 없다. 욕망이 사그라든 인간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는 것을 갱년기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겠다고 안달복달하지만 않으면 그냥저냥 평온한 삶이다. 그냥 아무개로 살 것. 아무개가 되어 지금 나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작가든 뭐든 아무거나 다른 존재로 살아볼 것. 찰나를 영원으로 이어갈 것. 바쁘게 사느라 놓쳤던 찰나의 순간을 천천히, 자세히 들여다보는 거다. 어쩌면 그것이 내게 허락된 삶일지 모르겠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만큼만 욕망하고 더 갖겠다는 욕심이란 놈을 다스리는 것. 지금 가진 건강을 잘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는 것.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나의 도전일 수 있겠다. 다행히 크게 성공한 적이 없어서 낙폭이 크지 않다. 처박히는 기분도 덜할 것이다. 그렇다고 꿈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당장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언젠가 지나갈 기차역 같은 것으로 여기자는 것이다. 누군가 인정하고 불러주는 그림책 작가로 사는 건 아니지만 읽고 쓰고 그리면서 그림책이 주는 만족감을 마음껏 누리면 된다.

영화평론가 김혜리는 "인간은 삶에 포함돼 있지 않을 때 그것의 전경을 조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이 유용하다"라고 했다. 갱년기는 잠시 삶에서 나를 떼어내 나를 조감하게 한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혼자 있고 싶으면서 살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다. 진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는다. 그래서 갱년기는 유용하다.


-내가 또 불안해하면 그 말 다시 해줘. 아무개로 충분하다고.

유영은 걱정 말라고, 언제든지 되풀이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번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아무개로 충분해, 아무개로 충분해, 아무개로 충분해... 이미 알고 있는 말이지만 다른 이의 목소리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위안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안을 덜어주는 아무개들의 노년도 다양한 노년 중의 하나다. 가급적 성공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