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갱년기
자유와 해방은 달콤하지만 외롭고 쓸쓸한 고독의 시간이 이어진다. 고독은 '고독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이다.
고독을 죽음의 늪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은 혼자 있게 될까 봐 안절부절이다. 그래서 중년에 대한 강의나 책에서는 친구를 많이 사귀라고 하고, '지금' 나를 만나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라 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동안 연락 없이 지내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지금 나와 만나줄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인생에 친구가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당연히 친구가 좋다. 하지만 갱년기는 누군가를 만나며 쓸 에너지가 없다. 모든 에너지를 자신에게로 모아내도 모자란다. 실컷 수다 떨고 돌아서면 허무하기만 하다. 친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까탈스러워져서 그렇다. 젊을 때는 받아주고 참아지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내 마음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 '지금' 만나는 것도 좋지만 잠시 멈추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 거다. 혼자라는 두려움에 떨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독 속으로 뚜벅뚜벅 들어가 버리는 거다. 고독이야말로 나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르다. 고독은 지극히 자발적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독한 시간을 통해 혼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외연을 구축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본연의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거다. 열망했던 일도 책임을 짊어지던 일도 다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순간이 온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촉수가 더듬더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간다. 그 촉수를 믿고 따라가면 된다.
뒤늦게 동네에서 붓글씨 교실 다니다 등단하시는 분들이 있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만 적적하고 마음이 말랑말랑해져,라고 느끼면서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뭐라도 손에 잡히는 걸 해본다. 글씨를 쓰고 붓을 들어 난을 치고 꽃을 키우고 땅을 사랑하게 된다. 어떻게든 본질과 가까운 곳으로 가려는 본능이 시키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내 안의 아름다움과 고독을 찾아 침잠한다. 우리 엄마도 종일 반야심경을 쓴다. 그저 필사를 하는 거지만 자기만의 방 속으로 들어가 내면을 채우는 그 시간 동안 엄마는 예술가의 고독을 삼킨다. 예술이라는 게 별건가. 삶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삶의 본질을 찾는 갱년기에 예술적 자아가 꿈틀대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먹고 사느라 그럴 시간과 여유를 갖지 못했지만 이제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안내하는 그 길로 나선 것이다.
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고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을 통해 영적 정체성을 채워나가야 가능하다. 나이 들어 지혜로워지고 유머와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고독의 시간을 지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아름다운 삶을 내 손으로 일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낸 사람만이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깊고 넓은 심미안을 가진다.
꽤 긴 시간, 충분히 혼자 있었다. 맹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아무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림책을 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순간 그림을 ‘잘 그리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지만, 시작은 오로지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고독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시인 림태주는 ‘고독이란 비로소 자기 자신과 함께 있게 된 시간을 말한다’고 했다. 나도 비로소 나 자신과 함께 있게 되었다. 물리적으로도 혼자였지만 정신적으로도 깊이 몰입했다.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물이 내 귀와 눈에 철썩 부딪친다. 생각으로 골치 아파하지 않고 나의 존재를 유쾌하게 인식하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라고 했다.
친구 연수도 말했다. 대련이 좋대. 뭐가 좋다고? 대련. 겨루기 말이야. 친구가 주짓수를 배우는데 대련이 좋대. 대련이 어디에 좋다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대련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루소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존재를 인식하고 싶었다. 물이 철썩 부딪치거나 대련을 통해 몸과 몸이 부딪치거나. 생생하게 존재를 깨우는 방식이 아닐 바에야 혼자 고독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었다.
윤종신은 1년간 미국에서 ‘이방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휴식년을 보냈다고 한다. 어느 순간 사라지고 싶었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있다가 돌아오니까 공항에서부터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반가웠단다. 반가웠다니, 그동안 반갑지 않았다는 거 아니겠는가. 낯선 시간들을 통과해야 반갑고 감사할 수 있다.
인생의 어떤 시기가 오면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만 누구나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조건이 허락되어야 하지만 조건이 허락된다고 해서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것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훌쩍 떠나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 '이방인 프로젝트'라는 성과는 그런 시간들을 통과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후배 정안은 빈 둥지 증후군이 오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정안의 남편은 각자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정안 계좌에 정기적으로 입금을 해주었는데, 남편의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쓸모없어 버려지는 배신감을 느꼈다.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각자 독립이라니. 머리로는 남편의 뜻을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제 이 집에서 나는 쓸모가 없구나, 나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는 건가, 허탈해졌다.
그동안 정안은 가족과 육아 외에도 맏며느리와 맏딸로서 친정엄마의 간병과 시댁 뒷바라지를 해왔다. 자신이 자처하지 않으면 실행되지 못할 수많은 일들 속에서 정안은 정말 중요한 자리를 지켜왔다. 이제야 조금 잠잠한 시간이 주어졌다.
"만다라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미적인 색감과 모양과 승려들의 정성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만다라가 완성과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만다라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쌓여진 바로 그 순간, 승려의 모진 손이 둘레의 가장자리부터 중앙까지를 훑는다...(중략)...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만다라가 인생에 대한 상징이었음을."(<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채사장)
정안은 가족을 움켜쥐고 싶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인생은 만다라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인데. 정안은 움켜쥔 손을 펴고 ‘쓸모없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는 그동안 지나치게 중요한 역할을 맡아 쓸모 있는 일을 하고 가치 있는 일에 중심을 두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주느라 정작 자신에게 쓸모 있는 시간을 허락할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 잠시 쓸모없는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쓸모없는 시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쓸모없는 시간이야말로 때로 가장 쓸모 있는 시간이며 그 사람의 쓸모를 더욱 빛내기도 하는데. 쓸모와 가치에 대한 집착은 불안을 만든다. 말은 쉽지만 쓸모와 가치, 의미의 프레임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쓸모없음의 ‘쓸모’라고 말하지 않나.
정안에게도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고독 이전에 잠시 멈춤이 먼저다. 평생 무언가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잠시 멈추면 어떤가. 서둘러 무언가로 채우려 하지 말고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거다. 멈추면 텅 비는 것이 깊이 고인다. 주변인들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을 축적하다 보면 고독이 고일 것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혼자 있을 수 없는 사람은 함께 있어도 더 처참하게 외롭고 쓸쓸하다.
당연히 쉽지는 않다. 평상시에도 쉴새없이 켜놓는 티브이나 라디오, 핸드폰, sns를 끈다는 건 초인적 인내심이 필요하다. 잠시 샤워할 때나 운동할 때, 버스나 전철에서, 거기까지 걸어갈 때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음악을 켜고 보고 들을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우리들이다. 그 적적함을 견뎌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으려면 현실의 소음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짧게는 수초간, 길게는 수십분의 정적을 견디지 못해 매번 숨을 고르곤 한다. 하지만 숨을 길게 내쉬어야 다음 숨이 들어설 틈이 생긴다. 숨에 집중할 때 에너지가 차오른다.
갱년기는 질문을 살아가는 시기다. 답을 구하겠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답을 얻지 못해도 깊은 고독은 짙은 어둠처럼 빛을 모은다. 멈춰 서서, 고독 속에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가지는 거다. 평온한 고독이다. 꼿꼿하게 일상을 잘 영위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안으로 더 깊어지는 평온한 고독은 갱년기의 선물이다.
이제 아파트 구조가 바뀔 때도 되지 않았나?
친구 다온은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주거구조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데?
원룸의 시대잖아. 가족이 같이 사는 아파트도 각자의 공간을 좀 더 확장해주면 안 될까? 현관과 거실을 중심으로 간단한 조리시설이 갖추어진 방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거지. 사실 거실도 꼭 필요 없지. 로비에 미팅 룸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 연수원처럼 말이야.
나는 다온의 주장에 열을 올리며 찬성했다. 하지만 나만의 공간은 방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밖으로 나가 혼자 걷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오지게 재밌게 나이 듦>에서 김재환 감독은 "나이 들어보니 튼튼한 치아랑 무릎이 행복의 기본이랍니다. 치아가 좋아야 잘 드시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요, 무릎이 좋아야 이동의 자유가 생겨 친구들 만나 재밌게 놀 수 있다는 거죠. 나이 듦 준비는 펀드 연금 펀드 암보험 실손 보험이 아니라 양치질 열심히 하고 많이 걷는 습관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쓸쓸할 때마다 걷고 고독할 때마다 이 닦자.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고 걸으러 나가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러. 고독은 갱년기를 잘 보내는 방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