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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22. 2022

느티나무의 전령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매일 걷는다. 매일 쓰기 위해서 걷는다. 그래 봤자 아파트 단지 내를 종으로 횡으로 걷는 거다. 단지가 작아서 30분쯤 걸린다. 조금 더 걷고 싶으면 단지를 빠져나가 기찻길 옆 둑길을 걷는다. 기차소리를 막기 위한 펜스 앞에 작은 관목과 대나무가 엉성하게 자라고 있다. 가로수로 벚나무가 이어지다가 이팝나무가 이어진다. 단조로운 풍경이다.

단조로움 속에서 계절을 느낀다. 매일 달라지는 순간순간이 눈에 들어온다. 매일 살피는 데도 어제 보지 못한 꽃을 발견하거나 여태 보지 못한 나무를 발견할 때도 있다. 멀리 산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는 모양새도 계절을 실감 나게 하고 밤이면 바람으로도 냄새로도 계절은 변화를 드러낸다.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다니면서 계절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기껏 아파트 안에서 만나는 계절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다면, 꼭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주시길.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시길.      




6월의 여름은 뭐니 뭐니 해도 느티나무다. 이상기온이 시작되면서 5월에도 이미 한여름 같은 높은 기온을 기록할 때도 있지만, 느티나무는 언제라도 마른바람을 품어두었다가 습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찌는 듯한 더위와 장맛비가 몰아칠 때에도 시원한 바람 한 줄기를 내어준다. 습기와 더위와 비의 시간을 느티나무가 아니라면 어찌 견뎌내겠는가.

그런 귀한 느티나무를 이태나 잃고 살았다. 시골살이를 하다가 도시로 올 때, 지어진 지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머뭇거렸다. 어른 팔로도 둘레를 재기 버거울 만큼 굵은 나무둥치를 보며 여기 살자, 했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호박이랑 상추를 파는 할머니들이 있어 더 마음이 끌렸다.   


거실에 앉으면 창문 가득 느티나무 가지가 춤을 추었다. 작은 바람에도 쉬지 않고 춤출 만큼 잎이 무성했다. 차를 즐기지 않는데도 부러 찻잔을 들고 거실 창 앞을 서성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아침 요란한 기계소리와 함께 느티나무 가지가 출렁이며 무너져 내렸다. 놀라서 뛰어 나가 보니 가지치기를 한다는 거다. 무슨 가지치기를 여름을 코앞에 두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가을에 미처 하지 못해 지금 하는 거라며 어서 비키라고 손을 내저었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가 나를 풍요롭게 해 줄 때가 있다. 잃을 일이 없으면 알지 못하는 그것들은 숨 쉬고 말하고 웃을 유일한 것이 되어주기도 한다. 느티나무가 잘려나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다. 내가 느티나무 덕분에 이곳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니까 사람도 그곳에 바투 세우고 곁을 준다. 나는 출근 준비하는 남편을 동원했다. 때로 남자가 나서야 말이 먹히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지간하면 그런 본능을 이겨먹고야 마는 내 이성이 나를 오히려 부추겼다. 남편은 이 더위에 나무를 자르면 지열이 올라와 안 된다고, 나무가 있고 없고가 5도 차이는 날 거라고, 차들도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 나온 관리소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가을로 미루겠노라며 장비들을 몰고 갔다. 그해 가을, 이제 됐지? 하는 표정으로 나무를 자르러 왔다. 가지치기가 아니라 벌목 수준으로 기둥을 댕겅 잘라버렸다. 벌거벗은 느티나무를 꼬박 1년이나 지켜봐야 했다. 2년 차가 되면서 겨우 치부를 가리듯이 잎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정수리만 얹는 가발처럼 둥근 모양의 느티나무가 거실을 지키고 섰다. 아침 새소리도 다시 시작되고 찻잔을 들고 멍 때리는 시간도 돌아왔다.


사실 나는 느티나무와 벚나무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둘 다 나무기둥의 무늬가 가로로 나 있는 것이 비슷하게 생겼다. 이파리도 자그마하고 그저 보통의 나뭇잎처럼 생긴 것 또한 비슷하다. 요즘은 나무기둥이 조금 더 회색이면 벚나무라고 생각하는데 얼추 맞는 거 같다.

그걸 굳이 구별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다. 아파트에는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맥락 없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안을 걸을 때면 벚나무든 느티나무든 그저 즐기면 된다. 몇 걸음 차이니까. 하지만 밖에서 벚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 알 수 없는 길을 만나면, 벚꽃을 보러 봄에 올 것인지 무성한 잎을 보러 여름에 올 것인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딱히 그 계절에 맞춰 그곳에 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마음으로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한다.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또는 짙푸른 녹음을.


마을 앞에 선 것은 대부분 느티나무다. 집 앞에 선 것은 대부분 벚꽃이다(앗, 우리 집 앞에 선 것은 느티나무이니까 아파트는 빼고,라고 단서를 달아야겠다). 어느 마을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는 걸 보면 이곳은 보나 마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버린다. 기품 있는 어르신들이 감춰둔 장서를 꺼내들 것만 같고 몇 백 년 묵은 씨 간장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곳에서 마을을 지키는 청년들과 언젠가 인터뷰를 나누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아파트에도 느티나무가 있다. 새로 생긴 아파트는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오래전에 지은 아파트는 일단 마을을 형성하는 기본 단위에 느티나무가 들어가는 거 아닐까 싶을 만큼 입구에 한 그루 느티나무를 심었다. 당연히 우리 아파트 입구에도 느티나무가 서있다. 집이라는 안정감, 원초적인 휴식, 소속감을 느끼며 내 아파트, 내 마을, 내 집으로 들어선다.



낮에는 주로 할머니들이 화투짝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핫플레이스가 되기 때문에 그저 멀리서 바라본다. 조금 아쉽다. 물론 느티나무는 멀리서 바라보아도 좋지만 나무 아래 서서 위로 올려다볼 때가 가장 황홀하다. 빛의 산란으로 나뭇잎이 반짝반짝하는 것 같다. 언젠간 저 흔들림을 그려보고 싶다, 갈망하게 한다. 해를 맨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하시던 어른들 말씀대로 맨눈으로 말고 나뭇잎으로 한쪽 눈을 가린다. 부러 벌레 먹어 구멍 뚫린 나뭇잎을 들고 부신 눈을 뜨기도 하고,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절대 동색이 아닌 연-초-짙의 스펙트럼 한꺼번에 들고 만화경 놀이도 해본다. 걷다가 나무 위를 올려다볼 때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느티나무 뿌리는 꽤 넓게 퍼져있어서 발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느티나무 사이로 빛을 보았다면 밤에는 청량한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날이 더워지면 햇빛을 피해서 주로 밤에 걷는데 절대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느티나무 아래 혼자 서기 위해서다. 예전 같으면 맥주캔을 들고 앉은 동네 아저씨나 학원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 청소년들의 차지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편의점 앞에나 모여 앉지 아무데서나 삼삼오오 모이지 않는다. 덕분에 한적한 바람소리는 내 차지다. 걸으러 나왔으니 걸어야 하는데, 느티나무 아래 빈 의자를 보면 자꾸 앉고 싶다. 앉아서 느티나무 가지를 따라 흐느적흐느적 몸을 흔들고 싶다. 바람은 때로 쏴아 쏴아 불어오고 시렁 시렁 불어오기도 한다. 스스스스 불다가 시락시락 분다. 기둥만 남기고 잘라버린 느티나무는 굵은 가지를 쭉쭉 뻗어 올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가는 줄기를 늘어뜨리고 휘젓는 소리를 낸다. 나뭇잎들이 몸을 비비는 소리를 낸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누군가 오면 괜히 나무둥치에 등을 팡팡 두들겨본다. 최대한 엄마 치맛자락 붙잡은 아이처럼 치댄다. 치대는 만큼 내 것이 되는 것마냥.


비가 오면 얼른 거실 창 앞으로 간다. 그 어떤 소리보다 먼저 느티나무가 비소식을 전해준다. 찻물 끓는 소리 같기도 하고 타자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빗줄기에 따라 소리는 리듬을 탄다.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다만 이 네가지인 듯한데 묘하게도 소리는 그저 소리가 아니라 음악이 된다. 음악이라는 게 그렇잖은가. 피아노라는 악기는 조금 높거나 낮거나 빠르거나 느린 것으로 음악을 들려주지 않나. 그리고 피아노 단독으로도 연주하지만 다른 악기와 협주곡을 하기도 한다. 느티나무도 그렇다. 혼자만의 소리만 들릴 때도 있지만 조금더 귀를 기울이면 마침 새가 울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우러지기도 한다. 에어컨 실외기 위로 떨어지는 소리도 꽤나 주요한 악기가 되는데 가끔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럴 때 느티나무는 기꺼이 베이스가 되어준다.  비가 거세지면 운명 교향곡처럼 거창한 음악이 되는 거고 비가 오락가락할 때면 애절한 음악이 되어 귀를 붙잡는다. 얼마전 어느 콩쿨에 나가서 우승을 했다는 임윤찬의 피아노를 우연히 들었다. 클알못(클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의 클알못인 내가 한시간이 넘는 그 영상을 끝까지 다 봤다. 봤다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피아노 소리라는 게, 클래식이라는 게 별 거 아니구나, 커지고 작아지고 당기고 늘리는 그 소리가 좋으면 되는 거구나, 깨달았다. 느티나무 소리가 내 귀를 트이게 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느티나무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거기 느티나무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느티나무라는 어감이 주는 그 느낌 그대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기분이다. 몇 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겠지만 품이 작은 나는 몇십 년 된 느티나무여서 오히려 편안하다. 어쩌면 아파트여서 더 쉽게 내 것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마을 앞 수호신처럼 커다란 느티나무였다면 지금처럼 수시로, 거실 앞에서나 여기저기 걸으면서나 부비댈 수 없었을 것 같다.


오늘 저녁 퇴근 후, 아직 샤워하기 전에 아파트 주변 곳곳을 걸어보시라. 아직 해가 으스름하다면 고개 들어 우거진 나무를 올려다보고 이미 어두워진 후라면 귀를 쫑긋 세워보시라. 괜히 손으로 나무기둥을 만져도 보고 이파리가 떨어지면 후후 불어 깊은숨도 들이쉬어보면 더 좋다. 그럼 바람의 전령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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