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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ug 08. 2022

매미가 전하는 메멘토 모리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며칠 전 매미 소리가 났다. 벌써 매미가? 놀랐는데 잠깐 맴맴, 울더니 그 뒤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아무리 여름이 빨라져도 아직은 아니지, 하면서도 매미 소리를 기다렸다. 매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왜냐. 여름을 말하면서 매미를 빼먹을 수는 없으니까. 


오늘 아침 다시 매미 소리가 났다. 드디어 매미다! 반가웠다. 그런데 글을 쓰기로 작정해서인지 매미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매미는 원래 어느 날 느닷없이 귀가 따갑도록 맴맴 울어대는 게 특징인데 이 매미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아직 번데기에서 나오는 중인가 싶도록 여리고 가늘었다. 매미소리가 여리고 가늘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그랬다. 아직 몸이 채 빠져나오지도 않은, 아직 몸이 마르지도 않은, 아직 목청이 트이지 않은 상태로 젖어있는 매미가 연상되었다. 여린 매미가 겨우 매애, 맴, 숨을 뱉는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엉덩이를 때려주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줄탁동시 해주지도 않지만 오로지 혼자 힘으로 껍질을 벗고 명실상부한 매미가 되어 매미 본연의 책무를 시작한 것이다. 매애, 맴, 나야, 나. 내가 왔어, 손 뻗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곧장 예의 그 매미 소리를 우렁차게 내질렀다. 매! 맴맴! 

반가웠다. 아하, 매미야, 네가 드디어 매미 구실을 하는구나. 순전히 나의 상상이지만, 마치 생명이 탄생(은 아니고 변태)하는 숭고한 장면을 지켜본 것 같아 울컥, 까지는 좀 과하고 감정이 좀 격해지기는 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마치 아는 매미가 한 마리 생긴 것 같은 친밀감을 갖고 매미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 귀가 따갑도록 시끄러운 매미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지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매미소리가 거슬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보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엄청 크지만 우리 귀에는 안 들리는 거라는 말이 쉬이 믿어진다. 지구뿐만 아니라 나비의 날갯짓소리도 굉장히 크지만 우리가 못 듣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건 좀 믿기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매미만 한 나비가 지구만큼 큰 소리를 낼 리가 없지 않은가. 이렇듯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예단한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나 나비의 날갯짓소리도 호기심을 가질 법도 하건만 들어보지 못한,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은 호기심이라는 마음조차 주지 않는다. 

마음이라는 게 참 웃기는 거다. 듣겠다고 마음먹자 매미소리가 들리고, 들었다고 마음을 주고, 탄생(!)의 순간까지 안다며 매미소리에게만 마음을 허락하는 거다. 어쩌면 매미처럼 한 번쯤 그들의 날갯짓에 대해 쓰고 나야 나비에게도 마음을 줄지 모르겠다. 


늘 매미의 첫 울음소리를 듣고 한 존재와 깊은 유대감을 가졌는데, 몇 시간 후 한 매미의 죽음을 목도했다. 현관 앞에 시커멓게 배를 깔고 누운 형체를 보고 얼른 눈을 돌렸지만 그것은 분명 매미였다. 그래 봤자 도시에서 매미의 사체는 매미소리만큼이나 흔한 것이니 잠시 눈을 돌린다고 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알지 못하는 매미지만 하필 오늘 매미의 사체를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다.(앗, 그러고 보니 그 매미가 그 매미가 아니라는 확신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내가 아는 그 매미는 오늘 막 울기 시작한 어린 매미란 말이다...)  


그래서인가. 그동안 내게 매미소리는 살겠다는 악다구니로 느껴졌는데 이제 격렬하게 죽어가는 소리로 들린다. 도시 전체가 한 개체의 격렬한 죽어가는 소리로 뒤덮이고 있다는 생각에 여름철 호러물처럼 싸늘하다. 소리로만 존재하던 그들은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생명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대부분의 생명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흩어져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대로에 그대로 뻗어 유기물의 순환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기껏 이런 생각한다. 계절이 가고 있구나. 


매미는 7년간 땅속에 묻혀 있다가 겨우 14일간 매미로 산다고 한다. 어쩌면 내 영혼도 어딘가에서 몸을 얻기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14일 같은 평생을 살아가니 7년 같은 수백 년이 필요할 것이다. 지구별일지 또 다른 어느 별에서일지 모르지만, 땅속 같은 칠흑 같은 시간을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버텨냈을까. 살아가는 발악인지 죽어가는 발악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어떤 발악을 하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까. 

메멘토 모리, 삶의 뒷면에 죽음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고어다. 생명을 가진 존재가 짠하게 여겨지는 여름밤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존재가 간다
그대의 포효는 대단했고
그대 덕에 아침마다 몸서리치며 깨어났으니
짧은 생, 충분한 증명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허물을 벗고
성마른 날갯짓으로 가을을 독촉해대더니
이리 서두르는가
갈 때 가더라도 발톱 세워 더 붙들고 매달리라
껍데기라도 남아 여름을 붙들어라.
기온 1도 내려갈 때마다 

팔소매는 한치씩 늘어가고 늙은 어미의 살갗은 시리고 저리니
조금 더 아우성치며 울어재껴라


예전에 쓴 매미에 대한 시다. 아직은 매미가 우는 계절이니 좀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오늘 자신의 죽음으로 이 계절이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매미에게 바치는 시라고 하자. 그때만 해도 찬미에 가까웠는데 오늘은 애잔함이 스며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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