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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Nov 04. 2022

그날, 우리는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

일요일 아침, 에스엔에스를 훑어보다가 사고가 난 걸 알았다. 얼른 폰을 내려놓고 아침을 차렸다. 남편 전화기가 울렸다.

큰애는 교환학생 갔지. 작은애는 군대에 있고. 왜?

누군데 아침부터 아이들의 안부를 묻냐고, 남편에게 눈으로 물었다.

내 친구였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놀라서 남편에게 건 거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혹시 작은애가 외박을 나간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부대가 수도권이라 가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작은애에게 얼른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톡을 남겼다. 빨리 전화하라고, 어디냐고, 뭐 하고 있냐고.

설거지가 끝날 무렵 전화가 왔다. 아이는 걱정 말라는 말부터 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갔었다고, 길이 너무 혼잡해서 바로 옆 골목으로 갔다는 말을 했다. 괜찮으냐고 묻자, 아무래도 마음이 조금 안 좋다고 했다. 안도와 걱정과 속상함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그래 그래, 만 반복하다 끊었다.

갔었대?

남편이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한숨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에게 톡을 보냈다. 앞으로 외박을 나가게 되면 미리 우리에게 일정을 공유해달라고. 알겠다고 답이 왔다. 외박을 나가면 꼭 위치를 보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시 아들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뉴스를 틀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sns를 피했다. 그래도 덕질 계정의 sns는 괜찮겠지 했는데, 언제나 덕주 사진만 올리던 사람들이 다른 글들을 마구 리트윗 해놓았다. 무분별하게 올린 영상에 놀라지 말고 영상 미리보기가 되지 않도록 설정을 바꾸라는 글이 눈에 띄어서 얼른 설정을 바꾸고 다시 핸드폰을 내려놨다.
원래 하던 일상대로, 조금 더 촘촘하게 일정을 만들었다. 화요일 저녁 무렵이 되자 온통 세상이 그 얘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보지 않았을 뿐이지 오며 가며 보이고 들리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다시 아들에게 톡을 보냈다.  당분간 뉴스나 sns를 보지 말라고. 행여 마음이 힘들어지면 도움을 받으라고. 아들은 이번에도 순순히 답했다. 그러겠노라고.     

수요일 아침 신문(우리는 매일 아침 종이신문을 본다)을 집어 들었는데, 주인을 잃어버린 운동화 사진이 1면에 보였다.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이보다 더한 영상들도 봤는데 왜 운동화 따위에 이토록 감정이 올라오는 걸까? 그보다 신문에, 그것도 1면에 왜 운동화 사진을 실었을까? 재난보도준칙에 그 정도는 괜찮다고 되어 있는 걸까? 도대체 괜찮다는 기준은 뭘까? 어떻게든 마음을 붙들고 살아보겠다고 애쓰는데 왜 이렇게 안 도와줄까?


그동안 담담한 척했지만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sns를 켜서 그동안의 소식을 꼼꼼이 찾아봤다. 덕질 계정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사람들의 분노와 울분이 쏟아져 있었다. 현장에 있었지만 지금 특별한 증상은 없는 이들에게 의료기록을 남기라는 글이 있었다. 트라우마는 개인마다 시간차를 가지고 찾아오기 때문에 미리 의료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는 거다. 조심스러웠지만, 복사해서 아들에게 보냈다. 지금은 괜찮겠지만 그래도 기록을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지금 어떤지도 다시 물었다.

저녁이 되어야 아이가 핸드폰을 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톡을 확인했다. 그동안 자꾸 화가 올라왔다. 군대 있다고 안심했는데 외박을 하다니, 하필 수도권에 배정을 받아가지고, 왜 거길 가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거길 갔냐니. 아이를 다그치는 마음이 들다니. 잘못은 사회와 무책임한 정부에게 있는데, 내가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수시로 피해자를 탓하고 피해자를 단속하다니. 화살이 가해자를 향하도록, 피해자는 오로지 피해를 회복할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면서 무의식중에 자꾸 못된 버릇이 나온다.


sns 그곳에 갔다는 이유로 엄마가 아이의 덕질 물건들을 부숴버렸다는 포스팅이 있었다. 첫 번째 댓글은 엄마가 화가 많이 나셨을 테니 이해하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아래로는 엄마의 행동은 폭력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는다. 아무리 엄마여도 그런 식으로 화를 푸는 걸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자기 엄마도 그런 적이 있는데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고, 안전하게 돌아와서 다행인데 왜 엉뚱한 데 화풀이하냐고, 그런 표현방식은 절대로 배우지 말라는 말까지 있었다.  

세상은 변하고 아이들은 자란다. 우리만 변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방황하고 있다. 아이를 단속하고 아이에게 화를 내고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싸울 대상으로부터 피하기만 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다시 배워야 하는 걸까.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명징해지는 걸까.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윌 스미스가 크리스 락을 폭행해서 논란이 된 일말이다. 아카데미는 윌 스미스를 징계하기로 했다는데 나는 마음으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윌 스미스가 폭행을 한 건 잘못이지만 크리스 락이 먼저 아내 제이다 스미스를 우롱했기 때문인데, 왜 크리스 락에게는 퇴장을 요구하지 않고 윌 스미스에게만 퇴장을 요구하며 징계도 윌 스미스만 하는 건가.

윌 스미스를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크리스 락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가장 큰 피해자는 제이다 스미스이고, 크리스 락의 언어폭력과 윌 스미스의 폭력을 생방송으로 보고 있던 전 세계 시청자들이다.

한동안 이 문제로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데 나 혼자 풀어야 할 숙제처럼 끙끙댄 것은 폭력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의(正義)에 대한 명확한 정의(定義)가 내려지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가 배운 정의가 있다면 그에 따른 구체적인 태도도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저 유명한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오듯이, 정의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전 같으면, 내 가족을 욕하는 사람을 그럼 그대로 용인해야 하는가, 라면서 당연한 응징이라고 손뼉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3초쯤 망설이다 글쎄, 그래도 때리는 건 안되지,한다. 그래서 윌 스미스가 어떻게 했어야 하냐고.  


저녁에 아들의 답이 왔다. 지금은 괜찮지만 군내 의무실에 가서 기록해놓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뿐이었다. 하지만 일단 잘 적어두기로 했다. 내 아이의 상태뿐 아니라 저들의 행태도 일단은 적어야겠다. 시간이 지나야 명료해지는 것들은 기록만이 내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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