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어라

덕후의 등산일지

by 천둥

다시 토요일이 왔다. 등산을 해야지.

나에게 등산이란 그저 걷기다. 타박타박 걷기.

정상을 향해 오른다기보다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기 그 자체에 몰입하는 거다. 걷는 것만으로 일상을 성실하게 보내고 있다는 위로.


내 아이디는 대부분 toddle이다. 국카스텐 노래 중에 "Toddle"이라는 곡에서 따온 것이다. toddle은 ‘아기가 아장아장 걷다’로 번역되는데, 내게는 타박타박 걷는 이미지다. ‘엉터리 같은 나의 발걸음’이다. 나는 오늘도 엉터리 같이 타박타박 걸었다.


“앙금이 낀 다리에 거짓된 걸음이라며
떨어진 꽃잎처럼 다신 피지 못할 거라며
그래도 내겐 너무 달콤해


스물다섯 살 때였나, 지리산에 간 적이 있다. 지리산에 대해 뭣도 모르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따라갔다가 무릎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아무리 팔팔한 젊을 때라도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에 가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다니,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다. 올라가는 내내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묻고 또 물었다. 매번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답변을 믿고 남은 힘을 쥐어짰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아마 화를 내서 더 몸이 경직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천왕봉에 이르렀을 때 이미 무릎이 퉁퉁 부었는데 그 다리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번에도 무지해서 무식한 짓을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터벅터벅 걸은 것이다. 내려오는 길이 무릎에 더 안 좋다는 것도 모르고서.

그때 아작 난 무릎으로 30대를 보냈다. 지하철을 타러 내려갈 때마다 옆으로 게걸음을 걸었다. 이번 생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40대에 아비라기도를 하면서 삼천배를 통해 기적적으로 무릎이 나았다. 계단을 통통통 뛰어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무릎이 낫다니, 자유롭게 걷다니, 이게 내 몸이라니. 타박타박 걷는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가는 산은 오른다기보다 걷기에 적당한 편이다. 본격적인 등산길까지 꽤 긴 진입로가 이어지는데 풍광도 좋다. 긴 데크길이 있고, 산 그림자를 품은 저수지가 있고, 야생동물서식지도 있다(마을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데 야생동물서식지라니. 어쩌면 동물도 사람끼리 필요한 적당한 거리 정도면 충분한 게 아닐까. 그 정도 거리를 확보해주지 못해서 야생동물을 야생으로 살지 못하게 하고 사람도 사람 때문에 숨 막혀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 더 오르면 넓은 공터(처음에 공터를 보고 산 위에 이토록 넓은 공터가 있다니, 놀랐다)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고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진짜 산인 거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 어슬렁거리며 와서 쉬다가 내려가고, 등산복과 등산화를 갖춘 사람들은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능선 길과 고갯길. 어디로 가나 길은 하나로 모인다. 처음에는 능선 길이 쉬워 보이지만 저 꼭대기에 깔딱 고개가 있다. 숨이 깔딱 넘어가도록 힘들다고 해서 깔딱 고개. 어차피 한 번은 고갯길을 마주해야 하는 거다. 고갯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르다. 49대 51.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만, 어떤 선택을 해도 49대 51. 기껏해야 2 정도 차이를 두고 우리는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 그러니까 그만 고민하고 그냥 가는 거다.


나는 고갯길을 택한다. 능선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깔딱 고개를 피할 것을 먼저 생각하는 영악함이 싫어서다. 딱히 목표를 정하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걷는 거니까 미리 피하지는 않기로 한다.

작은 계곡을 건너는 구름다리를 지나 화장실이 있는 삼거리에 이르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벤치에 앉아 물도 마시고 숨을 돌리고 있다. 나는 쉬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지구력이 약하기 때문에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한다.

지난주에는 약수터까지 갔다. 약수터가 있었던 흔적도 없이 이름만 약수터다. 표지판에 쓰여 있다. 오늘도 약수터까지는 가고 싶다. 첫 주에는 운동기구가 있는 곳까지도 꽤 멀게 느꼈었는데 둘째 주에는 구름다리까지도 가깝게 여겨졌다. 오늘은 삼거리도 그렇다. 이거야말로 상대성이론이 아닌가. 글을 쓰거나 공연을 볼 때 시간이 금방 가는 것처럼, 몸에 배거나 신날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난다.

삼거리 이후부터는 조금 더 가파른 고갯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야 한다.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여기서 나의 덕주 하현우 님의 말씀이 생각나는데, 덕후는 언제 어디서나 덕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다.


등산은 명상과도 같다

등산은 당연히 건강에 좋지만 무엇보다 명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생각을 버리는 그 어려운 일을 힘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걷는다. 명상이라는 의식조차 없다.

그런데, 여기가 어딜까? 걷다 보니 못 보던 길이다. 아무래도 약수터를 지난 것 같다. 게다가 앞뒤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길은 길인 거 같은데, 내가 가려던 길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점에서 지금의 내 삶과도 같다. 우리는 이렇게 앞만 보고, 또는 앞사람만 보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아닌가 싶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멈추기로 한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영상으로 찍었다. 이왕이면 계곡물소리도 담고 꽃도 담고 새소리도 담았다. 멀리서 간혹 종소리 같은 울림이 들려오는데 딱따구리가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잘 알지 못하지만 자연의 소리는 직관이 맞는 경우가 꽤 많다.

이제 내려가는 길. 다시 생각을 버리고 걷는다. 삼천배로 낫기는 했지만 이제는 관절이 늙는 나이가 되어서 내려가는 길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조금이라도 경사가 적은 곳으로 발을 딛기 위해 눈이 바쁘다. 다리는 천천히, 눈은 부지런히.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돌길을 피해 흙길을 밟는다. 비가 올 때는 돌길이 유용하겠지만 평소 무릎에는 치명이다. 역시 인간이 만든 것은 대부분 그렇다. 무언가를 위해 몸을 희생해야 한다. 대자연 앞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느라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를 때보다 내려오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올라갈 때는 오로지 걷기만 했다면 내려오면서는 사진도 찍고 잠시 쉬기도 했다. 쉰다기보다 비켜서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때냐면 노래를 크게 틀고 가는 사람과 나란히 걷게 될 때, 그리고 목청 높여 대화하는 일행이 있을 때.

이별의 예감 때문에 노을 진 우리의 만남~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른다. 사실은 오늘 문득 그대 손을 마주 잡고서 창 넓은 찻집에서 다정스런 눈빛으로~ 그러다 정신을 차린다. 음악도 좋지만 나는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듣고 싶다. 얼른 비켜선다.

그다음에는 중년 여성들의 대화다. 독립하지 않고 빌붙어 사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 이어졌다. 빨리 비켜서지 않은 이유는 어떤 조언이 있을까 궁금해서다. 나도 비슷한 처지니까. 그러면 같이 못살지, 했더니 나가더라는 조금 허무한 조언이 이어졌지만 약간은 속 시원했다.


최악의 비매너는 뉴스를 들으며 가는 사람이다. 노래나 대화는 가끔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만 뉴스는 어떤 경우에도 미간이 찌푸려진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뉴스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무조건 옆으로 비켜선다. 아주 멀어져 갈 때까지 풍경도 보고 사진도 찍는다. 그러다 제비꽃을 발견했다. 올해 첫 제비꽃이다. 조금 있으면 아파트 화단에 하양과 보라 물감을 뿌린 듯이 가득하겠지만, 산에서 보는 제비꽃은 남다르다. 더 가냘프고 더 청량하다. 마치 외래종 민들레와 토종민들레처럼.

계곡물 떨어지는 장면도 찍는다. 유독 물소리가 커서 돌아보니 아주 작은 낙차인데도 물방울이 심하게 튀는 게 귀엽다. 카메라를 줌인하고 있었더니 지나가던 분이 무얼 찍느냐고 들여다본다. 카메라 방향을 아무리 봐도 딱히 피사체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사진가구만, 한다. 쿡, 웃음이 났다. 저분이 내일 이곳에 서서 카메라를 줌인해보지 않을까? 나도 한번 찍어볼까, 하면서.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지난주에 팽나무 명찰을 보고 팽나무를 알아보던 게 생각났다. 이번에는 때죽나무 명찰이 눈에 띄었다. 역시 천지에 때죽나무였다. 나중에는 산의 절반이 팽나무와 때죽나무로 이뤄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보였다.

잠시 뒤 갈참나무 명찰이 보였는데, 갈참나무야말로 산의 주인이로구나, 하면서 놀라워했다. 그런데 졸참나무, 굴피나무, 상수리나무 명찰을 발견하면서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져버렸다. 내 눈으로는 다 거기서 거기, 도저히 나무껍질로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때죽나무와 팽나무도 비슷해 보이면서, 분명히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다시 모르게 되는 초기화 현상으로 돌아와 버렸다. 연이어 보이는 떡갈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명찰들... 하하, 이제 웃음만 나오는구먼. 설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생각 없이 걷겠다고 하고선 또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아, 맞다. 눈 때문이었다. 등산을 시작한 이유가. 집에선 계속 읽고 쓰고 보면서 눈을 혹사하니까 밖으로 나와 눈을 쉬게 하고 싶었다.

등산의 목적이 자꾸 추가되는 걸 보면 인간은 참으로 다차원적인 이유와 설명이 필요한 존재인 것 같다. 그냥, 이유 없고, 목적 없고, 명분 없는 걸 참지 못한다. 나만 그런가.


어쨌든 때죽나무든 팽나무든 갈참나무든 읽지 말자. 쥐똥만큼 알고서 아는 척하지 말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받아들이자. 오늘의 교훈이다. 또 그놈의 교훈을 다지며 등산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