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보라

등산 초보의 등산일지

by 천둥

토요일 아침, 이제는 자연스럽게 등산 갈 준비를 시작한다.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날씨를 검색해서 이너웨어를 하나 더 입었다. 모자를 한 손에 들고 신발을 신다가 멈칫했다. 왠지 모르게 다리에 힘이 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무기력감이 느껴진다. 이대로 나가면 몇 걸음 못 가 돌아오거나 어딘가 다칠 거 같았다. 돌아서 신발을 벗었다.

잠시 소파에 누워 쉬다가 겉옷을 벗고 스트레칭을 했다. 발목을 돌리고 한 발씩 들어 종아리를 풀었다. 그래도 부족한 거 같아 기체조를 시작했다. 몸은 조금 개운해졌지만 마음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무리할 필요 없어 VS 엄살떨지 마. 팔을 흔들어 마무리 운동을 하면서 결정했다. 일단 가자. 산아래를 걷다가 오더라도 일단 나서자. 마침 남편이 차를 두고 나간 것이 생각났다.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운이 났다.

어제그제에 비해 바람이 찼다. 날씨 때문이었나. 하지만 따뜻한 방에서 잘 자고 일어났는데 왜 기분이나 몸이 다른 걸까. 참 신기한 것 같다가도 한낱 인간이 우주의 기운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거야 너무 당연하지 싶다. 날이 춥거나 덥거나 미세먼지가 심하거나 또는 민감하게 느껴지는 기압 같은 것들이 우주의 기운이라면. 아이가 어릴 적에 우주의 기운에 따라, 그러니까 음양오행론에 따라 야외활동을 할 건지 실내활동을 할 건지, 또는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먹일 건지 조금 새로운 것을 먹일 건지 살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 못 하는 아이에게 해당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변화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지난주에 비해 사람이 없다. 거봐,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그래도 우려했던 무기력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역시 엄살이었나... 피식 웃는다.

드문드문 내려오는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여자분이 있다. 등산을 시작한 첫 주부터 매번 만나는 분이다. 온통 검은색으로 아무런 치장 없는 복장에 마스크로 얼굴까지 가려져있는데도 유난히 기억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날렵함 때문인 것 같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한번 봤는데 기억되는 사람. 그의 과거가 상상되는 사람. 또는 궁금한 사람. 그래서 혼자 치닫는 상상을 억지로 멈추어야 할 때도 있다.

며칠 전 산책 중에 굴다리에서 어떤 여자를 봤는데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사각의 검은 가방을 들고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여자였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굴다리에서 또 그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차려입고 어딜 갔다가 그새 다시 돌아오는 건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가. 무엇이 그를 굴다리 하나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알지 못하는 여자를 기억하게 되면서 소설의 주인공은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 아파트 경비원의 시점으로 소설을 써볼까 한 적이 있다. 경비실의 작은 문밖을 오고 가는 발걸음과 옆모습만으로 상상하는 사람에 대해. 대단한 사건은 없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겉모습과 실제 모습의 낙차를 보여주는 거지. 등산을 끝내고 내려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괜찮겠다. 지나쳐가는 순간의 이미지만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상상해 보는 거다. 지금 어디에서 오는 길인지, 그곳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났는지,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상상하는 일은 멍때리는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다. 조금 전 내려간 날렵한 여자는 내가 그에게서 그 무엇을 볼까 봐 저어하는 것 같다. 눈이 투명해서 마주치기만 하면 다 알 것 같아서 서둘러 눈을 피하는 여자. 나도 얼른 눈을 피한다. 그게 그에 대한 예의인 것 같아서. 그리고 가능한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기로 한다. 이조차 상상이지만.

산은 멀리에는 연두를, 가까이에는 초록을 흩뿌리고 있다. 날이 흐리지만,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다. 발밑에도 작은 꽃들이 잔뜩 뿌려져 있다. 오를 때는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고 내려올 때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왜 내려올 때보다 오를 때 더 아름다운 걸까. 산도 그렇고 인생도), 걸음걸음마다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아주 작아서 고개를 숙이고 봐야 하는 것들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핸드폰을 들이밀고도 줌을 당겨야 찍을 수 있다. 찍는 순간, 탄성이 나온다. 눈으로 본 것과 다른 것이 화면에 있다.



개별꽃(돌아와서 검색해서 알았다)은 보라색 점이 박혀 있었다. 다시 자세히 보면 점이 아니라 꽃술인 걸 알지만, 점이든 꽃술이든 보라가 아주 강렬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얀 꽃이기는 하지만 탁한 색이라 눈으로 봤을 때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데, 자세히 보면 이다지도 예쁘다니.

괭이눈은 아직 봉오리 상태다. 혹시 핀 것이 있을까 하여 올라가면서도 보고 내려오면서도 계속 살펴봤지만 활짝 핀 것은 없다. 아직 그들의 시간은 아닌가 보다. 보일 듯 말듯한 봉오리가 몽글몽글 모여 있는 모습이 어여쁘다. 이 어여쁜 것을 맨눈으로는 보지 못하다니, 도대체 눈으로 본다는 건 뭘까. 과연 눈으로 보고 믿는 것, 이라는 말처럼 바보 같은 말이 있을까. 그래도 사진으로나마 보는 게 어디냐, 위안을 삼는다.

눈에 많이 띄는 것은 현호색이다. 꽃 이름 자체가 색으로 끝날 정도로 보랏빛도 있고 자줏빛도 있고 푸른빛도 있다. 이름을 검색하면서 알게 된 것은 꽃만 현란한 게 아니라 잎도 현란하게 변한단다. 다른 사람들도 현호색 앞에 쭈그리고 앉아 사진에 담기 여념이 없다.

반가운 진달래도 있다. 왜 특별히 반갑냐면 추억이 담겨있어서다. 첫사랑이 군대 간 날 진달래꽃을 꺾어 진달래 술을 담았다. 제대하던 날 그 술을 주었는데, 울컥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맛은 그다지...

진달래는 가까이 봐도 아름답지만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인 광경이 진짜배기다. 그런데 사진으로는 그 느낌이 잘 담기지 않았다. 눈으로 봐야 더 잘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다. 카메라 렌즈보다 더 잘, 더 입체적으로, 더 복합적으로 보는 우리의 눈에 경배를. 그리고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라 봄일까. 볼 것이 많아지고 자세히 보게 되고 보는 맛을 느끼게 되어서 봄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걷기보다 보기에 집중하기로.

천천히, 발밑을 내려다보고 멀리 내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흔들리는 바람을 보았다.


그리고 올라갈 때와 달리 아무 생각없이 오로지 내려오는 것에만 집중해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