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느껴라

등산 초보의 등산일지

by 천둥

벚꽃이 만개한 토요일이다. 벚꽃 길을 향해 가는 차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산에도 봄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웬걸, 아주 썰렁했다. 다들 벚꽃구경 갔나 보다.


아! 한산하기에는 산이 너무 예쁘다. 지난주와는 비교가 안 되게 산이 초록을 입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봄은 진짜 봄이 아니고 봄이 오는 길목, 환절기였을 뿐이고 오늘이야말로 진짜 봄. 봄볕을 느낀다. 연두연두했던 나무는 더 싱싱해졌고 흐릿했던 진달래도 짙어졌으며 저수지 물은 초록 산 그림자를 품었다. 세상이 더 환하고 진하고 수다스럽다. 햇볕으로 옷을 벗게 하는 나그네 이야기는 우화가 아닌 실화다. 물이 올랐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실감한다. 봄은 정말 만물이 살아나게 하는지, 노랑나비 흰나비 호랑나비가 나폴나폴 날아다녔다. 눈앞을 따라다니는 날벌레도 살아나서 아무리 쫓아도 계속 쫓아온다. 그래, 너조차 반갑다.

기후변화로 봄이 짧아지고 있는 요즘, 봄을 길게 느낄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느새 여름이네, 하기 전에 하루하루 봄의 변화를 느끼는 것. 쫀쫀하고 밀도 있게 봄을 즐기는 것. 산에 다니는 덕분에 이번 봄은 제법 풍성하다. 덕주 사진으로 가득했던 핸드폰 앨범이 봄으로 덮이는 중이다.


나무그늘 아래에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온다. 노골노골 녹아내리는 바람이 아니고, 옷섶을 여미게 하는 선득함도 아니고, 시원하면서도 보드라운 바람이다. 산벚꽃이 바람에 나부끼다 콧등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믿어서가 아니라 절로 손을 펼치게 된다.

저수지 옆에 뿌리째 쓰러진 나무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초록이 보인다. 살아있구나.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 산에는 쓰러진 나무가 꽤 많은 편이다. 대부분 죽었고, 때로는 죽은 나무로 비스듬히 놓인 바위를 받쳐놓기도 했다. 과연 죽은 나무가 바위를 떠받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깊은 숲을 연상하게 하는 크고 우람한 나무들도 많이 쓰러져있다. 나무는 쓰러져서도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는구나, 감탄한다. 하지만 초록이 올라오는 것만 하랴. 쓰러져서도, 뿌리가 거의 드러나 있으면서도 순이 돋고 물이 오르고 우리들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한다.


정신없이 나무와 꽃과 물과 바람을 느끼느라 자꾸만 발을 헛디딘다. 오로지 걷기 위해 걸을 때는 발밑을 잘 내려다보며 조심했는데, 오늘은 눈길을 잡아끄는 풍경에 감탄하느라 허방을 짚는다. 게다가 그동안 신던 신발이 조금 미끄러워서 다른 신발을 신었더니 이번에는 뒤꿈치가 아프다. 슬슬 장비를 갖춰야 하나. 뭔가 시작할 때 장비부터 갖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씩 해가면서 장비를 사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후자다. 산에 다니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얼마나 하게 될지 몰라 등산화도 사지 않고 버텼는데 이제는 사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뭔가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 보람찬 순간을 좋아한다. 이 느낌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미리 마련하지 않는다.

잠시 옆으로 비켜선 틈에 매주 산에 올 때마다 만나는 여자가 휙 지나간다. 이제 얼굴을 보지 않고 뒤태만 보고도 알겠다. 단발머리가 찰랑거린다. 걸음걸이 때문인지 특유의 흔들림이 있다. 나는 왜 저이를 이리도 잘 기억하는 걸까.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왜 한순간의 만남이 기억에 박혀 아는 이처럼 느끼는가. 어느 누군가와는 왜 이렇게 인연이 쌓이는 건가. 내가 무심코 만지는 이 나무와도, 어여쁘다 쳐다보는 나비와도, 몇 주째 오는 이 산과도 어떤 인연일까. 인연이라는 건 정말 다음을 기약하는 걸까. 어쩌자고 나는 이 얕디얕은 인연의 꼬리를 붙잡나. 깊고 진한 피붙이와의 인연도 무심한 주제에. 혹시 나처럼 누군가는 나를 기억해주려나.


망상인지 명상인지를 하다 보니 이제 오를 만큼 올라온 것 같다. 왼쪽 무릎에 작은 통증이 생기는 걸 보니. 이제 내려갈 때다. 조금만 더 올라가고 싶다고 아무리 마음이 속삭여도 넘어가선 안 된다. 마음은 올라가는 게 끝인 줄 안다. 내려가는 것까지가 등산이다. 몸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자각하지 못하고 마음을 따라가려 하니 얼른 돌아서는 게 좋겠다.

산기슭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뭐지? 돌아보는데 땅이 꿈틀꿈틀 들썩인다. 아마도 땅 밑 짐승일 텐데 이렇게 땅이 들썩이는 건 처음 본다. 뭔가가 튀어나오면 어쩌지? 겁이 나면서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작대기 하나를 던져본다. 아무 기척이 없다. 산은 태연히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갔다. 마치 내가 잘못 보고 잘못 들은 것처럼.

예전에 나무를 끌어안은 적이 있는데 나무에서 소리가 났다. 너무 선명한 물소리였다. 뿌리에서 물을 끌어올리는구나, 나무는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해서 동행한 친구에게 귀를 대보라고 했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덕분에 허풍쟁이가 되어버렸는데, 나는 숲의 정령이 특별히 나에게만 나타나준 거 같아서 좋기만 했다. 어쩌면 요정 이야기도 이렇게 탄생했겠지. 조금 전 들썩였던 땅도 어쩌면 버섯요정이었을지 몰라, 혼자 웃는다. 고개를 내민 동물을 본 게 아니었으니까, 이왕이면 동화나라에 다녀온 셈 치는 거다.



혼자 산을 오르다 보면 앞뒤에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약간 무섭고 으스스할 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왁자한 사람소리가 난다. 오늘은 산 아래에서 기타와 드럼 소리가 요란하다. 토요 버스킹을 한다며 리허설 중이란다. 얼른 김밥 말아서 남편이랑 나들이 나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