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 봄선생, 정말 이럴 텐가. 그만 좀 하시지. 봄이란 녀석이 얼마나 밀당을 잘하는지 잠시 잊고 완연한 봄이 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비온 뒤 기온이 쑥 올라갈 줄 알았는데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아침저녁으로 극성을 부리더니 덕유산에는 눈이 왔단다.
옷을 몇 겹으로 입고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깨가 시려 다시 패딩을 꺼내 입었다.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바로 후회했지만 내려오면서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만큼 날이 매서웠다.
Hi, 초록! 아무리 추위가 뒷목을 잡아도 산은 일주일 만에 완전 초록의 물결이다, 단 일주일만에! 물을 흠뻑 빨아들인 나무가 잎을 잔뜩 내뿜어 복슬강아지처럼 탐스럽다. 지난주만 해도 붓끝으로 톡톡 쳐서 색을 뿌린 듯했는데 오늘은 물감을 흠뻑 묻혀 쓱쓱 붓칠을 해놓은 것 같다.
오늘은 남편과 같이 왔다. 남편은 정상까지 다녀올 생각이라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고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본다. 더 짙어진 초록 속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한 장면이다. 어떤 장면은 평범한 하루인데도 오래 남고 어떤 장면은 아주 특별한 순간인데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한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둔다는 것이 이런 거겠지.
계곡물이 제법 깊어져서 보는 맛이 있다. 계곡을 왼쪽으로 끼고 가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고 다시 계곡을 넘어가는데 계곡인 줄도 모를 만큼 물이 얕다. 그런데 오늘은 조심조심 살피며 건넜다. 여름이 오면 누군가 징검다리를 만들겠지. 나도 징검다리 하나 놓을 수 있으려나. 징검다리는 모르겠고 너럭바위 위에 돌탑을 하나 쌓았다. 아슬아슬하게 높이 쌓인 돌탑도 있지만 돌탑이라 하기에 민망한 너럭바위가 좋다. 누군가의 여유가 느껴져서 마음이 간다.
길가에서 다래순을 발견했다. 아싸, 드디어 향긋한 봄을 먹을 때가 왔구나. 산나물이라고는 다래순과 두릅 정도만 알아보는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다래순이 눈에 들어오다니.
어떻게 알아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넝쿨가지 위로 나란히 줄서듯 순이 핀다고, 마치 전깃줄 위로 참새들이 차례로 앉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해주지만 엉뚱한 것을 가리키며 저거냐고 묻는다. 벚꽃과 매실, 살구, 사과꽃이 한꺼번에 피면서 꽃을 구분하는 법이 짤이 되어 돌았는데 덕분에 나도 꽃송이를 유심히 보기도 하고 나무와 나뭇잎을 살펴보기도 했지만, 정말 안다는 것은 그렇게 관찰하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듯이 척 보면 척 알아야 진짜 안다고 할 수 있다.
발밑의 작은 꽃들도 그렇다. 아주 작은 흰꽃이 있길래 개별꽃인가 하고 들여다봤는데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주름꽃이란다. 며칠전에도 꽃잎이 큰 개별꽃도 있구나 했더니 산자고라는 다른 이름이었다.
노랑꽃은 더 어렵다. 뱀딸기와 양지꽃, 복수초, 괭이눈을 사진으로 찍었지만 구분할 수가 없다. 아직은 내게 그냥 노랑꽃일 뿐이다. 꽃을 알고 나무를 안다고 산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검색을 해야 애정도 생긴다.
어쨌든 다래순이 반갑다. 무엇보다 기특하다. 바로 길옆인데 어떻게 뜯기지 않고 용케 숨어있었을까. 순 따는 손맛을 아는 나로서는 몇 개라도 따고 싶은 유혹이 컸다. 하지만 임산물 채취는 불법이라 애써 손을 거두었다. 사실 다래순이 별맛은 없다. 그저 봄을 먹는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뿐. 마침 전날 오가피 순을 사서 먹었으니 참자.
조금더 내려오다 이번엔 고사리를 보았다. 양치식물은 대부분 고사리처럼 생겨서 구분하기 어렵지만 이것도 딱 보면 안다. 분명 고사리였다. 고사리 꺾는 맛도 끝내주지. 하지만 이것도 얌전히 패스.
천천히 꽃도 찍고 새도 찍고 계곡물도 찍는데 남편이 나타났다. 벌써 정상에 올라갔다 왔단다. 역시 빠르다. 나도 오늘은 지난번보다 조금 더 높이 올랐는데. 매번 내가 돌아서 내려왔던 풍경을 지나쳐 오르는 게 어디냐, 스스로 기특해한다.
산을 내려와 에어건으로 옷을 털고 돌아서는데 나물 파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그분들도 어쩌면 산에서 채취하셨겠지만(솔직히 그분들은 공식적으로 허가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게 웬 땡이냐 하는 마음으로 반색을 했다. 취나물 달래 씀바귀 표고 머위 씀바귀 부추 쪽파 민들레 두릅 등 다양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달래와 부추가 자연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 오늘은 향긋한 봄을 먹자.
몇 가지 나물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오늘은 지역축제가 있는 날이라 남편과 오후에 그곳에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지만 차들이 너무 많아 하릴없이 드라이브만 하고 돌아왔다. 그곳에서 먹으려고 싸간 치킨에 두릅을 얹어 먹으니 궁합이 끝내줬다. 다이어트하느라 닭가슴살만 먹는 남편은 두릅이랑 먹으니 퍽퍽하지도 않고 향도 나서 먹을 만하단다. 나는 치킨의 기름진 껍질을 두릅으로 싸서 먹었다. ㅋㅋㅋ
저녁에는 달래를 송송 썰어 달래장을 만들고 소금과 들기름만 조금 넣어 슴슴하게 취나물을 무쳤다. 자연산인 게 분명한 게 장에서 파는 여린 취와 달리 오래 데쳐야 했고, 여린 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짙은 쌉싸름한 향이 밥을 다 먹은 후에도 입안에 남았다. 이것이 과연 취의 향인가 놀라웠다. 단 두 가지 반찬이었는데 어찌나 풍성하게 느껴지는지. 역시 봄에는 봄나물을 먹어야 한다.
내일은 구운 표고를 쪽쪽 찢어 소금장에 찍어먹어야지. 머위에 쌈을 싸면 고기보다 맛있겠지.
그리고 다음 주에는 쪽파랑 민들레랑 부추를 사서 데쳐 먹고 무쳐먹고 전도 부쳐먹어야겠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다음주가 기대되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