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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27. 2023

빈소에 앉아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메멘토모리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던 날 아침, 아버님을 계속 보살폈던 누님은 기분이 영 안 좋았다고 한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이 그저 더러운(!) 기분이었단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난 다음날 아침, 누님은 찌뿌둥하던 몸까지 개운해졌다. 우리 아버지 좋은 데 가신 것 같다고, 누님이 활짝 웃었다. 

내내 같이 살았고 거동을 못 하시면서부터 아버님을 도맡아 돌보던 누님이 상실감에 힘들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을 시작으로 가족들은 가볍게, 울 때는 울었지만 웃을 때는 주저 없이 웃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나쁘지 않았다. 호상이니 뭐니 하는 말들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존재의 상태적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넓은 분향실이 없어서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을 테니 작은 데서 지내고 내일 넓은 데로 옮기자 했는데 웬걸, 식탁이 부족해 손님들이 서둘러 가고 있는 사람들은 의자를 더 구해와 겹치고 겹쳐 앉았다.       

나는 주로 빈소에 앉아있었다. 국화로 가득한 제단 위에 아버님 사진이 놓여있었다. 평소 노인회관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셔서 봉사상을 받았고, 그 덕에 사진전문가가 영정사진을 찍어 주었다. 아프기 전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분향실 앞 안내문에 적힌 나이 88세. 지난 5월에 뵈었을 때 아버님은 내 나이가 구십인데 어린애 다루듯 해서 화가 난다, 고 역정을 내신 적이 있다. 아들이 옆에서 할아버지 구십이야? 묻기에 그냥 하는 소리야, 하고 답했는데, 계산해 보니 진짜 우리 나이로 구십이었다. 

구십. 평생 우리 집안은 수명이 짧다고, 환갑이나 넘기면 다행이라고 하셨는데, 거의 반평생을 더 사셨다. 예상치 못한 세월에 아버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처음에는 불안하다가 나중에는 감사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이라고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말했는데, 아버님도 그곳에 잘 이르셨을까. 나는 지금 잘 이르고 있을까. 

당뇨가 심해지고 고관절이 굳어서 결국 요양원에 가신지 4년째. 여전히 힘이 좋고 정신도 말짱해서(약간의 치매증세는 있었지만) 가만히 누워있는 게 힘드셨던 긴 시간. 식성도 좋으셔서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못 먹게 한다며 시트 안쪽에 좋아하시는 밤빵을 숨겨서 들어가도 했었지(사실은 약간 식탐이 있으셔서 먹지 않더라도 손에 쥐어드리면 좋아했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는 걸 침대를 벗어나기 어려워 한 번도 그 원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원망과 통탄의 시간이기도 할 텐데...         


유서를 다시 쓰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죽어갈 것인지(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더 깊이 생각하자. 내가 죽은 후 어떻게 장례를 치러주면 좋을지도 써보자. 우선 나는 국화대신 국화 그림을 그려놔야겠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상여를 장식하는 종이꽃 수파련 말고는 실제 꽃을 사용하지 않는단다. 국화는 일본 왕실의 꽃으로 아마 일제때 들어온 문화인 것 같다. 제사상도 그림으로 대신하고, 오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써놓고 싶다. 제사상에는 오로지 밥만 올려달라고 해야지. 조화는 절대 사절. 식사를 대접하지 말고 간단히 물과 식대를 드리는 걸로 하자. 화장도 환경에 유해하니 버섯수의(인피니티 매장 수의, 버섯의 균사체와 미생물, 그리고 100% 생분해 소재를 이용한 수의라고 한다)나 종이관 등을 사용해 달라고 해야지. 가능한 의식이 있을 때 함께 해온 친한 분들과는 미리 인사를 나누는 사전 장례식을 하고, 본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라고 해야지. 혼자 이런저런 구상을 해본다.  

갱년기를 심하게 겪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고, 마침 코로나에 걸려 격리되면서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는 간단히 가족들에게 알려야 할 것들만 썼다. 여러 가지 비밀번호라든지 SNS처리 같은 거. 그 뒤에는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쓰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가는 이의 의지대로 될 것 같지 않다. 장례는 가는 이를 위한 것이 맞지만 남은 이들이 치르는 것이다. 나는 오롯이 망자와 마주하는 시간이 의미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조용히 망자를 추모하는 게 무서울 수 있다. 주로 회피형의 인간들이 그러한데, 아들도 남편도 회피형. 절대 오롯한 시간을 가질 사람이 아니다. 아, 죽은 후에도 내 뜻대로 안 되겠구나.   


그저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유서를 쓰는 걸로 만족하자... 나에게 잘 이르는 것. 우주의 차원으로 볼 때는 아무 의미 없는 생명체라지만 있는 힘껏 의미를 담아 나 자신에게 이르도록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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