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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16. 2024

오늘의 꽃, 가시엉겅퀴

어떤 일은 느닷없이 닥친다. 갱년기가 그랬다. 살아온 내내 수없는 뒤척임 끝에 몸을 뒤집고 수없는 넘어짐 끝에 서서 걷고 수없는 옹알이 끝에 ‘엄마’라고 내뱉었는데, 아무런 행위의 반복이나 전조증상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멀쩡하던 데가 아프고 아프던 곳은 더 아프고 땅속으로 꺼질 것 같은 우울감에 시달렸다. 

내 몸을 내가 어쩌지 못한다고 한탄하다가 순간 깨달았다. 언제는 내 몸을 내 맘대로 하고 살았나, 주어진 조건에 맞춰 살았지. 어떤 이는 잘 달리고 어떤 이는 잘 말하고 어떤 이는 모든 게 그저 그래도 그런 나를 받아들였지. 애써봐야 쥐꼬리만큼 나아지거나 말거나. 

그러니 다시 내 몸과 마음에 적응하면 그만이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다. 주저앉은 김에 신세한탄도 좀 하고, 그동안 무심했던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느려진 몸에 맞춰 천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연습도 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글을 썼다. 신세한탄을 남에게 할 수는 없어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지겹도록 반복해야 해서. 쓰다 보니 남들이 같이 봐도 좋을 만한 글도 좀 쓰게 되었고 쓰는 게 재밌어지기도 했다. 

쓰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다행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고 몽땅 내 시간으로 확보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는 흔한 말, 알고 보니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급격히 에너지가 줄어서 남들을 배려하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를 보여주는 건 상대에게보다 내게 더 해롭기에 외롭더라도 혼자의 시간을 택했다. 오롯이 나 자신을 보살피는 데 몰두했다. 

느려진 몸에 맞춰 손을 움직였다. 그림이 도움이 되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무심코 보아 넘기던 사물과 자연을 들여다봤다. 내 숨에 마음을 모으고 걷고 하늘을 보고 산에 올랐다. 조금씩 삶의 풍경이 바뀌어갔다. 갔다. 엄마는 왜 꽃을 좋아하는지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나도 엄마처럼 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더 작은 것, 더 소소한 것, 더 하찮은 것들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그림에 담았다. 

쓰는 것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고 그리는 것은 생각을 비우기에 좋다. 오로지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되니까 잡념 없이 몰입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졸라맨도 그릴 줄 모르는 똥손이다. 남들만큼 그럴싸하지 않으면 아예 시도도 못하는 쫄보다. 수많은 반복과 연습 끝에 다다랐을 남들의 능력을 부러워만 했지, 한번도 내가 시도해볼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런데 갱년기를 맞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지자 신기하게도 제일 못하는, 그래서 잘할 기대치가 아예 없는 것을 시도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배우기에는 너무 바탕이 없어 혼자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3년을 그렸다. 미련해보이지만 내게는 적당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잘할 필요 없어서 더 좋다. 무턱대고 한다. 예전처럼 겁내지 않는다. 까짓 거, 그래봤자 그림인데 뭐.      

다시 갱, 갱년기를 맞아 다시 내 몸을 운용할 방법을 찾았다. 내 방법이, 내 그림이 갱년기를 건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나도 하는데요 뭐~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꽃이 있다. 처음 본 게 아니라 그날 유난히 마음에 들어오는 꽃. 그럴 때마다 ‘네가 오늘의 꽃이야’라고 속삭여주곤 했다.


오늘도 가시엉겅퀴를 발견하곤 ‘오늘의 꽃’이로군, 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줌을 당겨 꽃만 자세히 보이도록 아주 가까이 한 장, 조금 멀리 해서 줄기와 잎이 나오게 한 장.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며 가슴 한켠 따스함을 잠시 느끼는 걸로 끝이다.


내가 걷는 장소는 주로 아파트 주변. 그러니 대단히 특별한 꽃을 만날 일은 없다. 화단에 많이 심는 흔한 꽃이나 들꽃, 들풀이다. 가시엉겅퀴도 보랏빛이 강렬하기는 하지만, 귀한 꽃에 속하지는 않는다. 요즘에는 몸에 좋다고 해서 일부러 재배하기도 하나 본데, 들에서 핀 꽃까지 그러모을 정도는 아니다.


그런 대단치 않은 꽃과 풀이 차츰차츰 내 폰 속에 쌓여가고 있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라는 노래처럼 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초록빛과 붉은빛을 품었던 순간을 이제는 조금 더 길게 깊게 진하게 남겨보려 한다. 


가시엉겅퀴를 처음 알게 된 건 몇 년 전 단양에 갔다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관광지에서였다. 긴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 가시엉겅퀴 무리가 있었다. 보통 엉겅퀴는 연한 보라빛인데 그것은 자주색에 가까웠다. 진한 붉은 빛이 오래 잔상으로 남았다.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될 무렵이었다. 대단한 발전은 없지만, 색깔에 민감해졌던 것 같다. 어머, 너무 예쁜 꽃이네, 여자 몇이 까르르 웃어대며 엉겅퀴꽃을 향해 걸어오는데, 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는지 알것같았다. 꽃도 예뻤지만 그꽃을 즐기는 모습은 더 예뻤으므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순간의 환한 웃음은 밝고 짙은 에너지를 뿜어냈고 고스란히 내안에 스며들어왔다.     


대학 때 들었던 ‘엉겅퀴야’라는 민요가 있다. 전쟁통에 혼자 호미질하는 아낙네를 그린 내용인데, 아마 그냥 엉겅퀴가 아니라 가시엉겅퀴가 아니었을까 싶다. 보통의 아낙네가 엉겅퀴로 산다면 전쟁통에 혼자 된 아낙네는 가시엉겅퀴로 억세게 살아내야만 했을 테니까. 가시엉겅퀴는 꽃 위에까지 가시가 돋아나 있어서 언뜻 보면 섬뜩할 정도다. 자세히 보면 줄기와 이파리, 꽃까지 이어진 가시가 꽤 일관성 있게 느껴진다. 꽃말조차도 ‘고독한 사랑’이다.  

갱년기를 겪으며 고독은 소중한 사유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엉겅퀴처럼 거칠고 외로운 세월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긴 노년을 잘 맞이할 수 있다. 그러니 노년의 사랑이란 무릇 고독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 나이든 부부라 할지라도 각자의 고독을 잘 다룰 수 있어야 진짜 사랑으로 무르익을 테니.  

 




#오늘의꽃


#가시엉겅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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