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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16. 2024

몰라도 되는 것들, 말냉이

오늘의 꽃은 말냉이. 

집 뒤쪽으로 기찻길이 있다. 어렸을 때 부산에서 살았는데 기찻길 옆이었다. 대문도 없고 옆집도 없는 넓은 들판 가운데 우리 집이 덩그러니 있었다. 멀리 기차가 지나가면 절대 내가 닿지 못할 세상이 저 너머에 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는 듯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대여섯 살 때니까 내 기억인지 언니들 얘기를 하도 들어서 상상한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기찻길 옆에 살았다는 것이 왠지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이 노래 덕분인 것 같다. 마침 그 무렵 동생이 태어나 언니들이랑 갓난아기를 돌보았다. 엄마가 아기를 재우고 잠시 나간 새 아기가 깼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손가락을 물려서 다시 재우곤 했다. 돌아가면서 물린 건 빨아도 아무것도 안 나와서 우는 아기에게 또 다른 손가락을 넣어 짭조름한 맛이라도 빨게 한 거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웩, 아기에게 못할 짓을 한 건데 그때 우리는 아기를 다시 재웠다고 의기양양했겠지. 물론 이것도 내 기억이 아니라 언니들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언니들보다 훨씬 동생을 예뻐하고 돌봐주었던 건 확실하다. 그건 식구들이 모두 인정한다.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어찌나 물고 빨고 예뻐라 했는지. 

이야기가 산으로 갔는데, 내 말은 지금도 기찻길 옆에 사는 게, 싫지 않다는 얘기다. 남들은 기차소리가 나면 소음공해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아련한 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방음벽이 잘 되어있어 귀 기울이지 않으면 기차소리가 나는지도 모를 정도다. 

기찻길 방음벽을 따라 도로가 있는데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그 길이 내 아침산책길이다. 

말냉이가 핀 곳은 그 방음벽 틈 사이, 한 줌 흙이 있는 곳이다. 주변에 볼거리가 없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게 내 눈에 띄었을까. 마치 유칼립투스 잎처럼 생겨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봤다. 사실 말냉이를 발견한 건 오늘이 아니다. 벌써 며칠 전, 언뜻 보고 특이하다, 생각만 하고 그냥 지나갔다. 가는 내내 사진을 찍을 걸, 후회가 되어서 오는 길에 주의 깊게 살피면서 찾았다. 다시 눈에 딱 띄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그때는 하얀 꽃도 피어있어서 꽃을 중심으로 한 장, 잎을 중심으로 한 장 사진을 찍었다. 

며칠 일이 있어 산책을 못하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 꽃이 지기 시작하는구나. 그다음에는, 안녕? 꽃이 다 졌네. 그리고 어제, 잎이 벌써 낙엽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커졌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는 길에 한 줄기를 꺾었다. 딱 세 줄기밖에 없어서 망설이긴 했는데 낙엽이 드는 걸 보니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 꽃을 말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원예가는 아니지만 외국산 유칼립투스 말고 이걸 키워서 꽃다발을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조심히 책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오늘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흔들리는 꽃을 보고 집에 오자마자 검색을 했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 이름을 몰랐다. 그냥 예쁜 꽃. 기찻길 옆에 핀 들풀이었다. 

“말냉이. 냉이의 한 종류. 두해살이풀. 어린순은 나물로 먹고 약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근데 지금까지 잎이라고 생각한 것은 잎이 아니라 열매였다! 조금 도톰하다 싶었던 가운데가 씨앗이고. 

씨 크기가 1센티 정도면 말냉이이고, 더 자잘하면 다닥냉이란다. 그러고 보니 다닥냉이를 만난 적이 있다. 작년 가을이라고 기억하는데, 아닌가? 말냉이 열매보다 자잘한 것들이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분홍과 보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정말 작아서 무심코 지나칠 수 있지만 빛깔이 너무 예뻐서 그 자리에서 바로 검색했었다. 아마도 붉게 낙엽이 져있어서 가을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니면, 지금부터 가을까지 계속 익어가는 것이겠지. 그러면 좋겠다...

스치듯 만나는 말냉이 덕분에 작고 보잘것없고 몰라도 되는 것들을 알아간다. 몰라도 되지만 알게 되면 반갑고 기분 좋은 풀꽃들. 다닥냉이처럼 금세 잊어버리겠지만 순간을 기억하고 지금을 풍성하게 보내며 오늘도 낯선 하루를 살게 해 줘서 고마운 너, 말냉이. 


#오늘의꽃

#말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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