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을 만든 친구처럼(그 친구 이름은 병희야) 먹고사는 문제와 ‘활동가’로서의 삶을 잘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야. 하지만 누구나 잘해나가는 건 아니어서 영 이상하게 변하는 친구도 있어. 그런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착잡해지곤 해.
병희가 처음 협동조합으로 장애인지원센터를 만들 때,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이리저리 알아보았어. 운 좋게도 병희는 협동조합 관련 일을 하는 지인이 셋이나 되었대. 협동조합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는 P, 협동조합을 직접 만들어 운영하는 C,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S.
당연히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는 P에게 먼저 도움을 청했지. 근데 P는 딱 잘라 말했어.
야, 그런 거 하지 마. 얼마나 골치 아픈데. 그냥 개인사업으로 해. 그게 제일 속편해. 네가 잘 운영하면 되잖아.
P의 반응에 병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중간에서 지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싶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어. 그러다 다시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어.
여러 사람이 뭔가를 같이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지 상상만 해도 겁이 나기는 해.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 않을 테니. 그래도 우리는 한 번 도전해보려고 해. 뭐부터 준비하면 될지 좀 알려줘. 전문가로서...
병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P는 힘껏 고개를 저었어.
내가 오죽하면 하지 말라고 하겠니? 너 성격 버려. 사람 잃고 돈 잃고 시간 잃는 일이야. 협동조합이 외국에서 잘된다고 우리도 잘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이야, 남들한테 기대서 대충 얹혀가려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 아니면 지원금 타먹으려고 하거나. 협동조합이 무슨 요술램프인 줄 안다니까. 한해에만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조합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유행처럼 뭐만 있다 하면 우르르 몰려왔다가 돈이 안 된다 싶으면 우르르 나가버리고, 협동조합 정신이라곤 전혀 없이 개나소나 덤빈다니까.
낯을 붉혀가며 반대하는 P를 보며 친구는 입을 다물었어.
우린 그런 거 아닌데, 진짜 제대로 해보려고 그러는 건데, 속으로 되뇌다 병희는 다시 생각했어.
그들도 진짜 해보려고 했겠지, 그런데도 잘 안 된 거겠지. 왜 잘 안되는지를 파악해서 지원해야 하는 게 P의 역할인데, 그 사람들 탓을 하다니, 그것도 막말에 가까운 험담을 해가면서.
병희는 P가 너무 낯설었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싶었지. 원래 P도 사회적 진출을 위해 이런저런 고민 끝에 사회적경제라는 분야를 찾아 투신한 거거든. 투신이라는 말 알아? 몸을 던진다는 뜻인데,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이 노동운동 말고도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되 운동성을 가지고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말이야. 장애인운동과 먹고사는 문제를 함께 해결한 병희처럼 P도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경제가 자본주의 시장에 어느 정도 완충역할을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그 자리까지 간 거야. 그런 P가 저렇게 염증을 낸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 아니겠어. P가 변한 거, 아니면 조직이 엉망인 거.
P말대로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뭔지 잘 몰라. 그래서 얹혀가려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그럼 P가 가르쳐야해. 협동조합은 얹혀가는 데가 아니라고. 아 참, 이건 나도 몰랐던 부분인데, 협동조합은 각자 잘하는 것을 살리고 부족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래. 누구는 물건을 만들고 누구는 영업을 잘하고 누구는 홍보를 잘하면, 그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면 되는 건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절대 서로 조율할 수 없다는 거야. P의 말대로 한해에도 수많은 협동조합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잘못된 이해 때문인 거지. 오히려 하나의 온전한 업체가 여럿이 모여 시너지를 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협동조합이라더군. 프랜차이즈처럼 말이야. 프랜차이즈는 여러 업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시너지를 내잖아.
이런 협동조합에 대한 잘못된 이해부터 그 장점과 단점을 가르치고, 협동조합정신을 바로잡으면서 지원해야 하는 게 P의 역할이지. 그런데 그들을 대충 얹혀가면서 지원금을 노리는 치들로 취급한다는 건, P가 초심을 잃었거나 실제로 그런 일이 너무 많거나 그걸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조직이 무너졌다는 거 아니겠어? 물론 P도 바로잡아보려고 아등바등 애써봤지만 뜻대로 안되었고 지금은 지쳤다는 뜻이겠지.
병희는 P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P야, 지친 네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어. 너는 이제 손을 놔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포기한 사람들만 남은 조직은 회생이 불가해.
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대. 왜냐면 P의 말투와 태도에서 대충 얹혀가는 사람들의 그것과 똑같은 게 보였거든.
그래서 병희는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으로 일하는 S를 찾았어. S는 더 펄펄 뛰었어. 절대로 하지 말라고 말이야. 협동조합은 결정이 느려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고 심지어 아무도 책임을 묻지도 않는 조직이라고 말이야. 같은 조합원이라는 동등한 구조 때문이라며 서열이 확실한 게 최고라고 역설했지.
병히는 이번에도 S에게 속으로만 말했어.
S야, 요즘은 서열이 확실한 공무원조직에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세월호나 이태원참사를 보면 모르겠니? 결정권이 분명한 조직의 수장조차도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지. 아무리 국민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도 먼저 나서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없다는 걸 학습해버린 거야.
언제부터일까. 갈등이나 문제가 생겨도 그걸 어떻게 해결해날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과정은 사라지고, 어떻게든 자기만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전국민적으로 나만 아니면 돼~를 공표해버린 <무한도전> 탓이 아닐까. 아니면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광고로부터 시작된 몰염치 탓이거나.
우리는 독재로부터의 해방, 즉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우리 힘으로 일구었지만 일상의 민주주의는 뒷전이 되면서 가부장은 있지만 가부장노릇을 하는 이는 없는, 책임지지 않는 가부장제가 자리를 잡은 거 같아. 어쨌든 그건 서열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마지막으로 병희는 협동조합을 직접 만든 C에게 물었지.
협동조합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해?
C는 줄줄줄 읊어줬어. 필요한 서류와 단계별 절차와 구성, 찾아가야 할 관공서와 찾아들어야 할 교육과 행정 등...
C는 병희에게 단 한 번도 어렵다거나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별 거 아니니까 해보라면서 자기보다 더 신이 나서 새로 바뀐 법률 등까지 알아봐주었어.
병희는 C에게 은근슬쩍 물었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느린 결정구조에 대해서 말이야. C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어.
협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대표가 사업의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시작하는 거야. 그걸 대표가 딱 틀어쥐지 않고 같이 논의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사람은 절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비슷한 듯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논의를 하면 할수록 다르다는 걸 발견할 뿐이야.
C는 그게 아주 고가의 워크샵에서 배운 내용이라며 으스댔어. 협동조합을 직접 해본 사람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데, 해보지 않은 사람은 고개만 갸웃댄다는 거야. 왜냐면 ‘협동조합’이라는 말 속에 모든 것을 같이 정하는 거라는 뉘앙스가 담겨있기 때문이지.
병희도 처음에는 C의 말에 수긍하기가 어려웠는데, P가 전문적인 공부는 했지만 현장에 있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에 새겼지. 덕분에 병희는 극단을 만든다는 결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대.
역시 현장이 중요하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C에게 좀 더 물어봐도 좋을 거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대충 얹혀가면서 지원금만 눈독 들이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했어. C는 그게 왜 문제냐며 눈을 치떴어. 다들 먹고사느라 힘들어서 어떻게든 국가의 지원을 받고자 애쓰는 거고, 남들보다 발 빠르게 정보를 찾아내고 시류에 탑승하는 건데 그걸 왜 비난하느냐는 거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 병희는 덧붙였어.
그게 아니라, 사회적경제의 가치는 사라지고 또 하나의 시장이 되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러지.
하! 가치!
C는 코웃음을 치다가, 병희 눈치를 보더니 얼른 표정을 바꾸었어.
가치도 좋지만, 그것도 경제야. 돈이 안 되면 무슨 소용이야. 그렇잖아도 가치만 떠드는 놈들 때문에 사회적경제가 오히려 엉망이 되고 있어. 경제는 그런 게 아니야.
C는 공동체를 내세운 활동가들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했어. 비슷비슷한 사례를 반복하면서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으면서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는 거야. 카르텔이라니, 누구 말대로 그런 게 있긴 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자신도 줄을 대기 위해 이리저리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하다가 말꼬리를 흐리더라나.
병희는 무릎이 꺾였어. 아마도 우리 세대는 이런 식으로 사회의 시스템을 무너뜨려왔나 봐. 기본이나 근본 같은 건 무시하고 오로지 경제를 향해 달리는 식. 사회적경제뿐이겠어? 교육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우리에게는 오로지 자원이 되느냐, 아니냐만 남은 거 같아. 오죽하면 교육부조차 교육인적자원부가 되었겠어?
그때 병희는 결심했어. 꼭 협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 은연중에 개인사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나 봐. 하지만 절대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고 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변하지 않으리라 자신하지 말자.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버리자.
그렇게 병희는 협동조합 회칙에 재정을 투명하게 밝히기로 적시했고, 조합원들은 오로지 그것만으로도 병희를 믿고 따른다네.
얼마 전 ‘뒷것 김민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김민기 씨가 배우나 스텝 들에게 계약이나 수익정산 등을 원칙대로 정확하게 하잖아. 김민기 씨에 대한 신뢰는 그의 능력이나 신념이 아니라 그런 투명성에서 오는 걸 거야. 내 생각에는 그래.
병희는 지금도 투명하게 잘 운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병희가 모든 걸 잘한 건 아니야. 아주 실망스러웠던 적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