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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11. 2024

꽃처럼, 수박

사람들은 세상이 허구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내 최초의 기억은 변호사가 억울한 사람을 위해 변호하는 게 아니라 ‘돈 낸 사람’을 위해 변호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억 소리 나도록 놀랐고, 그 뒤에도 꽤 오랫동안 설마 그래도 억울한 면이 있으니까 변호하는 거겠지, 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누구나 그런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하다 싶다가도 세상이 그런가 보다, 나만 유별난가 보다 하면서 점차 무뎌져 간다. <#돌멩이를치우는마음>도 그런 허구의 발견으로 시작되었다. 학교잖아. 왜 학교가 잘못을 교육하지 않고 처벌만 하는 거지? 왜 피해받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회복될지 묻지 않을까? 왜 갈등의 맥락은 지워지고 ‘사건’만 ‘처리’될까? 나는 이 사회가 학교를 교육적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토록 입시위주로 시스템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어떤 어린이는 ‘내 물건처럼 아끼자’라는 표어를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했다. 내 물건이야 내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남의 물건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왜 내 물건처럼 아끼자고 하냐고. 이 말을 직접 들은 어른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거다.   


#새파란돌봄 이라는 책에는 세상이 말하는 청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돌봄을 떠맡고 있는 청년들 이야기가 나온다. 6년간 할머니를 돌보다 등교를 거부한 청년이 이런 말을 한다.

“학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늘리고 능력을 키워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죠. 하지만 집에 계신 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요... 학교는 능력향상을 중시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능력을 키우거나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날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마음속에서 모순이 생겨요. 내 가족이 할 수 없는 일이 점점 늘어나는데,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싹트죠. 이런 모순에 가장 많이 직면하는 사람이 영케어러 아닐까요.”

모순을 만나는 것. 거기서 ‘파란’은 시작되는 것이다. 책은 돌봄의 경험을 넘어 새로운 사회 모델을 고민하는 데까지 이른다.

갱년기를 맞닥뜨렸을 때 가장 많이 한 생각도 ‘아직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일까’였다. 세상의 잣대와 상관없이 내 멋대로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실상은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갱년기는 삶의 허구성을 다시 직면하게 해 주었다.      


친구에게 언제 세상의 허구를 깨달았냐고 물었더니 세월호를 말했다. 그랬지. 온 국민이 동시에 허물어졌지. 우리가 쌓아 올린 것이 모래성임을 알았지. 그러고도 채상병 문제며 문자 읽씹이며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한 일들이 쌓여가고 이젠 허구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환멸을 느끼고 조롱해 버리지.  

지금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딘가는 삶의 터전을 잃은 수해민들이 속출하고 대전에도 다리가 무너지고 있다며 실시간으로 영상을 보여주는데, 그런 사건사고조차도 너무 지엽적이고 단편적으로 처리되는 것 같아서 마치 허상처럼 보이지.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 변호사가 그런 직업이라는 것에 신자본주의 세상이 그렇지 뭐, 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그때 놀랐다, 나는 지금도 종종 놀란다, 고 기록하는 것. 학교에서 말하는 삶과 집에서 겪는 우리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언어화하는 것. 각자가 발견한 허구를 고발하고 주변을 장악하는 방식, 장악한 내용을 중심으로 끌고 가는 방식. 그거야말로 글로벌시대에 필요한 가장 로컬적 삶의 형태가 아닐까. 누군가는 아무나 글을 쓰는 시대라며 충실한 독자노릇이 더 필요하다고 개탄하지만, 누구나 글을 쓰게 되면서 우리가 놓쳤던 영케어러들도 발견하게 되지 않았는가.

       

화단에 누가 수박씨를 뱉었는지 넝쿨을 이루더니 드디어 수박이 열렸다.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내 주먹 정도 크기밖에 안 된다. 신기해서 매일 들여다보며 기특해했다. 비가 많이 와서 수박이 물러 버릴까 봐 걱정했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다행히 무사하다. 남편이 그거 거름도 안 줘서 맛없을 걸, 한다. 먹지 못하는 수박이라니 그거야말로 허구가 아니냐 싶겠지만, 먹는 거 아니고 보는 거다, 꽃처럼.

이 비에 수박 걱정하고 그림 그리는 팔자라니,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궁금한데, 당신이 처음 겪은 세상의 허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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