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인터뷰, 돌푸딩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마침내 온 국민이 바라마지 않던 하나의 문장이 선포되었다. 집회현장에서 동지들과 그 당연한 상식을 기뻐하며 얼싸안고 함성을 질렀다. 잠시 후 그를 만났을 때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아 우리는 일단 손바닥을 마주치며 짧게 환호한 후, 인터뷰를 시작했다.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광장을 찾은 그에게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그는 인터뷰를 고사했다. 초반에는 집회에 열심히 나왔지만 3월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까지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지친 사람의 이야기도 들려주는 게 좋지 않겠냐는 시우('나'로 당당히 광장에서 만나요)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나는 고마움에 덥석 손을 잡을 뻔했다. 맞다. 광장에는 분명 지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은 나도 잠시 인터뷰를 쉬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구역질이 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내란성 불안, 내란성 우울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돌푸딩(30세, 여, 대전 유성구, 백수)은 외국에서 살다가 5년 전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올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가족들은 아직 외국에 있고 그는 외할머니와 산다. 어려서부터 ADHD와 우울증을 앓고 있어 취업을 미루고 휴식기를 보내는 중이다.
비올라를 전공한 그는 학과의 특성상 대학생활 내내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연주회나 시험 때는 항상 긴장하는 편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런데 작년 12월에는 이미 졸업연주회를 마치고 시험도 끝냈기 때문에 대학생활 마지막을 친구들과 여유롭게 즐기면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날도 돌푸딩은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으며 가벼운 수다를 떨고 후식으로 빙수까지 먹고는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느긋하게 핸드폰을 보는데 계엄이라는 단어가 떴다. 농담인가, 했는데 곧이어 담화문과 영상이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그는 당황했다. 순식간에 몸이 긴장되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친구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 진짜냐, 이제 우리 어떡하냐, 하는 톡을 보내왔다. 아직 소식을 모르고 있던 부모님과 통화를 한 후에도 실감이 나지 않아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말에 그는 엑스(트위터)에서 만난 친구들과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했다. 2018년도부터 알게 된 친구들인데 흔히 말하는 ‘유니콘’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단짝이다. 덕질하는 장르도 같고 우연히도 대전에 살고(심지어 그가 외국에서 대전으로 왔다) 종종 만나서 게임도 하는 사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의견까지 일치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아리 친구들과 집회에 가기도 했다. 만화나 일러스트를 좋아하는 동아리인데, 30년 전에는 민중미술로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을 부활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계엄에 대한 비판 정도는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치적 발언을 조심해 달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번 계엄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범죄일 뿐인데 그 정도도 부담스러워하다니 안타까웠다. 그는 요즘 또래에 비해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지 않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가족에 대한 특검도 거부권 행사를 해대는 걸 보며 분노했다.
중학생이던 시절 박근혜 탄핵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친구가 깃발을 맞췄다는 말을 듣고 돌푸딩도 깃발을 만들었다. 덕질하는 대상의 이름을 살짝 바꾸어, ‘전국프리티전사협회’.
돌푸딩은 <프리큐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세일러문>이나 <요술공주 밍키> 등의 계보에서 이어져온 프로그램이다. 어릴 때부터 보고 크다가 본격적으로 덕질한 건 2010년부터다. 어려서는 예쁜 옷이나 액션 등의 외형적인 모습에 이끌렸다면, 지금은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우는 마음과 힘은 누구에게나 깃들 수 있다는 스토리에 매력을 느낀다. 다문화 청소년 등 다양한 정체성의 캐릭터를 보며 우리가 원하는 차별 없는 세상이 바로 저거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덕후들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수성이 높을 거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다르게 상상해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은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만이 암울한 현실을 바꿔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아직 좋아하는 마음이란 게 있을 때 말이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탄핵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부채감이 항상 있었던 것 같다. 외국에 나가있었고 어렸을 때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방관했다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못한 만큼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앞장서 집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2월 말부터 그만 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나, 다른 데 시간을 쓰고 싶다, 토요일 약속을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런 생각이 쌓여갔다. 지쳐가는 그에게 친구들은 잠시 쉬었다 하라고 권유했고, 스스로 생각해도 더는 무리였다.
핑계 같지만,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스피커로 울리는 소리가 청각에 부담을 주었다. 초반에는 앞에 앉아서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조금씩 뒤로 물러났고, 연주회가 있을 때는 팔에 무리가 될까 봐 깃발 흔드는 것도 조심했다.
결정적으로 윤석열이 구치소를 걸어 나오는 장면을 보며 너무 허탈하고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우리의 뜻을 전한단 말인가. 두 개의 마음이 요동치며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사실 사람이 많고 언제 돌발 상황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집회장소에 간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항상 불안을 달래주는 약을 챙겨갔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반창고 등 응급용품까지 챙기고 다녔다. 하지만 광장은 생각보다 서로를 도와주고 배려하고 다정했다.
남태령집회에 간 적이 있다. 둘째 날 오후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많아서 앞에서 하는 말들이 거의 안 들렸고 깃발을 들고 있어서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김밥, 물, 핫팩, 간식 등을 다 챙겨주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갔는데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사당동까지 다 같이 걸을 때에는 전농 분들이 길 중간에 드문드문 서서 걸어가는 동지들에게 일일이 감사함과 응원의 말을 건네며 토닥여주었다. 돌푸딩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만약 그날의 기억이 아니었더라면 더 빨리 방전되었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사우나 갔다가 집회 갈래? 또는 푸딩 먹으러 갔다가 집회 갈래? 했다. 그러면 슬그머니 따라나서기도 했다.
파면소식이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주문 한마디로 회복이 되면 얼마나 좋겠냐며 웃는다. 하긴 일시적으로 기분은 좋아지겠지만 1년의 1/3이나 힘들었는데 어떻게 한 번에 회복이 되겠는가.
파면선고는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계엄 관련한 과제만 해도 산더미다. 국민의 힘 정당도 해체해야 하고 내란에 연루된 사람들도 처벌해야 한다.
그는 검찰개혁도 해야 하고 군대 체계도 바로잡아야 하고 잘못 쓰이고 있는 예산도 확인해서 환수해야 한다며 무슨 구호부터 외쳐야 할지 고민하다, 민영화 문제도 심각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힘들다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힘들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마음 내줘서 고마울 뿐이다. 그렇게 널브러졌다가 또다시 광장으로 나오는 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구원했다. 이제 좋아하는 마음이 그들 스스로를 구원할 때다.
“저처럼 마음이 먼저 지친 분들이 부채감으로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의 말을 들으니 얼마 전 수염이 허옇게 기르신 어르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박정희 때 투쟁하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나왔어.” 그는 살짝 박자를 놓치기도 했지만 쉬지 않고 구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