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인터뷰, 최서희
남태령 대첩을 보면서 저건 혁명이다, 생각했다. 보통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때 혁명이라 부른다. 대체 남태령의 무엇이 혁명을 떠올리게 했을까 종종 생각해 본다.
갑자기 혁명을 떠올린 이유는 최서희(25세, 직장인, 대전 유성구)의 내면에 일어난 혁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ADHD로 삶에 아무런 진동이 없던 그에게 광장의 시간들은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고 에너지를 불러와 삶이 급격하게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면선고가 내려진 날, 그는 회사동료들의 축하 메신저를 받았다. 다 같이 생방송을 보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파면소식이 전해진 순간 많은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내수경제 진작을 위해 직원들에게 커피를 돌렸다. 저녁에는 집회에 가서 깃발 동지들과 축하파티를 했고, 모처럼 토요일을 늘어지게 잤다.
중학교 때 세월호를 겪으면서 그는 심한 부채감에 시달렸다. 그들이 죽어가는 동안 몰랐다는 미안함, 유가족들을 위로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다. 박근혜가 탄핵될 때 그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집회에 다녔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대가는 오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아직 어릴 때였는데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어른들을 탓하지 않고 왜 부채감을 가졌냐고 하자 그가 되물었다.
시민으로서의 주인의식은 어른이 되어야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한번 깨닫는다.
그렇다 해도 그는 유난히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장녀이고, 어릴 때 동생이 크게 다친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지만, 그의 실수로 다친 것도 아니라니 딱히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어쨌든 지나친 책임감과 감수성이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아서 그는 일부러 정치와 사회문제를 외면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은 하얗게 공백이다. 아니, 계엄선포가 있기 바로 전까지는.
“원래 나 정도면 정치에 무관심한 거고 중도에 속하는 편이라고 해야 맞잖아요.”
계엄이 있던 날, 그는 일찍 자리에 누웠다. 불면증이 있어 전날도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톡이 쉬지 않고 울렸다. 친구들이 수다를 떠나 보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끄려 했는데 계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뉴스를 확인하고 망연자실했다. 부모님은 지방에 있고 동생은 자취하고 있어 집에는 혼자였다.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일단 상비약과 물을 사다 놓으라고 했다. 그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서 양팔이 무겁게 물을 사들고 왔다. 이러다 가족을 못 만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밤을 꼴딱 새웠다.
그는 주말에 국회로 향했다. 책임감에 불이 들어온 거다. 서둘러 맞춘 깃발을 든 채였다. 박근혜 탄핵집회에서 본 깃발을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다. 어떤 글귀를 담을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트위터에서 본 ‘정신과 개근환자라는 건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던 터였다.
국회 앞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살짝 공황이 오기도 했지만, 그의 깃발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와 약병을 보이며 저도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을 건네는 이들 덕에 버틸 수 있었다.
깃발과 함께 ‘농담곰’ 그림이 그려진 옷이 항상 그와 함께였다. 원래 그는 게임을 덕질했다. 얼마 전 페미 논란으로 ‘터진’ 바로 그 게임. 마음이 힘들 때마다 게임을 하면서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고 자캐를 만들기도 했는데, 더 이상은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은 바로 끊지 못하고 얼마간 더 했었다.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단번에 끊어낼 수가 없었단다. 그런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나서 결국 그만뒀지만, 부끄러우니까 글에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쓰자고 그를 설득했다. ‘터진’ 게임을 더 한 것보다 말도 안 되는 딱지를 붙여 혐오를 일삼는 게 부끄러운 거 아니냐고, 분노는 그들을 향해야 한다고.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글로 쓰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
이것저것 다른 게임을 해봤지만 그는 어느 것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농담곰'이었다. 한창 유행할 때는 모르고 있다가 이모티콘이 다시 출시된 걸 보고 홀딱 반했다. 언젠가 지인이 농담곰으로 래핑 한 차 사진을 보내왔다. 농담곰을 보니 네 생각이 나,라는 문자와 함께. 최고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그 욕구를 상대에게 쏟는 거죠.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나의 확장’인 거 같아요.”
덕질을 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확장’이라면 사랑을 하는 것도 받는 것의 일부일 수 있겠다.
14일에도 그는 서울로 올라가 탄핵이 가결되는 순간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한껏 감정이 고양되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나가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생각이 많아지고 죄책감이 생기고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매일 누워있기만 하고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들을 한참 보냈다. 그런 시간이 마음을 회복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때 윤석열이 구속취소가 되고 대전에서 매일 집회를 시작했다. 평일이라 참여자 수가 많지 않아 기수들이 위협을 느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집회에 나갔다. 시민발언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자 몸은 힘든데 마음은 개운했다.
"매일집회로 바뀐 게 저에게는 큰 변곡점이죠."
집회가 끝나고 그는 동지들에게 내일 보자, 인사를 했다. 무심코 말하고서 그는 흠칫 놀랐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서 오늘 죽어야겠다,를 되뇌던 그에게 내일 약속이 생긴 거다. 매일 잠들면서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약속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내일 계획이 생기면서 내일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매일집회가 그에게는 매일 할 일이 되었고, 매일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의 혁명이 시작된 단초다.
매일 집회에 나오면서 민주노총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앞서서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이 생겼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겪고 노조 사무실에 달려가 상담을 받았는데, 비정규직이라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답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일으켜 혁명을 시도했다. 민주노총 일반노조에 가입해서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기로. 그는 벌써 내규도 만들었고, 이제 신고만 하면 된다.
파면이 선고된 후 매일 집회는 끝났지만, 그는 민주노총 청년사업 기획단으로서(어느새 기획단원이 되었다) 4월에는 세월호 사업을 준비해야 하고, 5월에는 노동절을 준비해야 한다. 깃발동지들과도 다음 투쟁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다. 그는 이제 바쁘다 바빠,를 되뇐다. 그래도 토요일은 누워있을 거다. 마음건강을 위해.
광장은 그에게 ‘의지’를 만들어주었다. 살 수 있는 의지, 계획을 세울 의지. ‘이전과는 다른,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의지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스스로 존재가 ‘희미하다’고 느꼈는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존재감을 느낀다. 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행여 노조가 와해되더라도, 그의 정신이 또 그를 덮치더라도 혁명을 시도한 경험이 그에게 남아있음을 그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패한 경험이 아니라 시도한 경험이고, 공백이 아니라 징검다리가 놓인 거니까. ‘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을 잘 돌보는 거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그의 삶이 계속 이어지길. 쉬다가 다시 광장에 나왔듯이 힘들면 또 쉬다가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걸 잊지 말길.
우울증 환자가 지나치게 의욕이 앞서면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그는 지금 과욕을 부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의사나 전문가들이 보면 말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그를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혁명을 시도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원래 혁명은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 끝없이 변하고 변하고 변하고, 따르고 따르고 따른 후에 산속 싶은 곳,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 묻히는 것*. 그렇게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는 것.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부끄러워서 의사에게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데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가 속 시원했으면 좋겠다.
나도 인터뷰한다는 느낌보다 대화하는 기분이었고 내내 즐거웠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무장해제하는 매력이 있었다.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친근하고 푸근했다. 모처럼 글 쓰는 것도 크게 어려움 없이 풀어나갔다.
* ‘벨라차오’ 노래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