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없고, 낭만은 가득하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각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급하게 싼 대형 캐리어와, 보름뒤에나 체크인 가능한 파리 숙소 외에 아무런 준비 없이.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첫날 갈 곳을 정하지 않았다'. 렌터카로 남프랑스를 돌아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연극에 정신을 쏟다 보니, 여행에 관한 모든 것을 내일의 나, 연극 후의 나에게 미뤄둔 것이었다.
이렇게 남프랑스를 갈 수는 없다. 일단 파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 파리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가는 길 에어비앤비를 검색했다. 너무도 임박한 나머지 3군데의 에어비앤비에서 거절을 당하고, 다행히도 북역(Gare du Nord)을 두 정거장 정도 남기고 도미토리 예약에 성공했다. 도미토리는 북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도미토리에 도착하고 나니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기가 몰려왔다. 도미토리 같은 방에 있던 한국인 동생과 함께 숙소 바로 앞 식당으로 갔다. 메뉴를 보는데 양파 수프가 있었다. 그 유명한 프랑스 양파 수프. 프랑스 첫 끼로 양파 수프면, 꽤 괜찮은 걸. 각자 양파 수프와 치즈 버거를 시켰다.
양파 수프를 기다리면서 한국인 동생과 이야기했다. 한국인 동생은 대학교를 휴학하고 유럽 여행 중이라고 했다. 파리 여행의 막바지여서 파리에선 더 이상 볼 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들어보니 아직 더 가보면 좋을 곳들이 많이 남은 것 같았는데...'제가 8년 전 대학생 때 그렇게 여행하다가 결국 이렇게 다시 프랑스를 오게 되었어요, 그것도 한 달이 넘게 말이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좋은 게 좋은 줄 모를 때가 있다. (아니 이렇게 적고 보니 나 꼰대가 된 것 같다!!!!)
양파 수프가 나왔다. 크게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지친 몸을 풀어주는 뜨끈하고 달큼한 맛이다. 왜 8년 전에는 파리에서 양파 수프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못했을까. 테라스에서 양파수프를 먹고, 옆자리에서 떠드는 손님들의 보드라운 프랑스어를 들으면서, 드디어 내가 프랑스에 왔음을 실감했다. 이번 여행은 그냥저냥 흘려보내지 말아야지. 프랑스를 마음에 깊게 새기고 가는 방법을 알아내고 말리라.
프랑스 여행 전, 몇 가지 '낭만' 리스트가 있었다. 꾸준히 러닝 하는 것, 연극을 보는 것, 그리고 짧은 단발머리. 집 앞 천변을 달릴 때도 좋은데 센강은 어떤 기분일지, 유럽의 연극은 한국과 다를지 궁금했다. 출국 전에 러닝화를 갓 장만했다. 프랑스에서 첫 공기를 쐬게 해줘야지 하고서, 한국에서는 신지 않고 고이 모셔두었다. 단발머리는 아마도 프랑스 영화 <아멜리아>의 영향이겠지. 연극을 마치고 머리 자를 틈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근처 미용실에 전화를 돌려보고 가능한 곳에서 곧장 머리를 잘랐다.
파리 첫날 자꾸만 잠에서 깼다. 시차 적응 문제였다.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6시(한국시간으로는 오후 2시) 이미 잠에서 완전히 깨어버렸다. 이 긴 아침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캐리어에 챙겨 온 러닝복과 러닝화가 생각났다. 예상보다 아주 이르게 러닝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에서도 안 한 새벽 러닝을 파리에서 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배 변호사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뽑았던 곳이 생마르탱 운하와 뷔트쇼몽 공원이었다. 러닝의 목적지이자 반환점은 대략 생마르탱 운하로 정했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푸르른 새벽. 인적은 드물지만 곳곳에 벌써부터 하나 둘 러닝을 하는 사람,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아직 추운 파리의 공기가 목덜미에 기분 좋게 스쳤다. 퐁실퐁실한 갓 자른 단발머리는 위아래로 흔들리고, 새로 산 운동화는 탄성 좋게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데리고 온 낭만을 가득 안고서 계속 뛰었다. 마음속이 시원해진다. 동네를 구경하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게 어느새 생마르탱 운하에 이르렀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됐다. 생마르탱 운하 옆으로도 꽤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밤에 식당들이 불을 켜면, 운하 위로 불빛이 반짝이겠지. 이곳은 다시 밤에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러닝은 낯선 동네를 알아가는 좋은 수단이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굽이굽이 달리다 보면 아침에 어느 빵집에 사람들이 모이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유명해 보이는 멋진 건물들을 발견한다. 높게 드리운 가로수들, 여러 인종의 사람들, 여기저기 들려오는 프랑스어들, 낮고 오래된 건물과 그 아래 줄지은 조그마한 상점들, 이런저런 인증이나 마크가 달린 식당들, 이른 아침 벌써 문을 연 카페들이 눈에 들어온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달리는 동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던 인기 빵집에 들러서 빵을 한 꾸러미 사고 슈퍼에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샀다. 신이 나는 마음을 감추고, 마치 이곳에서 항상 그래왔던 사람인양 태연한 척. 이 낯선 풍경들이 여행의 끝에는 어떻게 느껴지게 될까. 하루빨리 프랑스를, 파리를 알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여행을, 이제 가야 할 직장도, 해야 할 일도 없을 때 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넘치는 시간을 무기 삼아 가기 어려운 곳들을 구석구석 가보고 싶었다. 어딜 가야 할까 이곳저곳 고민할 때, 남프랑스 렌터카 여행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남프랑스 소도시들을 제대로 여행한 사람은 없었다. 이 점은 나의 모험심은 물론 허영심(?)까지 자극했다. 나는 남프랑스 렌터카 여행에 '꽂혀' 버렸다.
파리의 첫 러닝을 마치고 도미토리로 돌아와 남프랑스 가이드북(e-book)을 사서 훑었다. 16일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고 싶은 도시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자리에서 도시를 추려 내려고 하니 다른 곳이 아른 거려서 도저히 고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략 니스에서 출발해서 툴루즈에서 끝내기로 하고(두 도시의 거리는 563km), 그 사이의 여러 도시들은 이동하면서 정해보자고 생각했다. 니스행 기차표는 몇 번의 새로고침을 반복한 끝에 다행히도 괜찮은 시간대로 하나 구했다.
이후 렌터카 예약 플랫폼인 rentalcars.com에서 16일간 렌트비용을 알아보니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비쌌다. 렌터카 하루 비용만 해도 지금 이 도미토리 1박 숙박비를 넘었고, 거기에 남프랑스 숙소비, 주차장비와 기름값까지 생각하면..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남프랑스에서 음식도 대충 포기할 수는 없는데. 그냥 큰 도시 위주로 기차를 타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렇지만 그 여행은 지금에만 가능한 여행이 아니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여행하고 싶다는 낭만은, 지금이어야 하고, 렌터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이 여유와 낭만을 생각하며 그냥 눈 질끈 감고 결제버튼을 눌렀다.
오답노트 : 중형차가 경차보다 렌트비가 싸서 별생각 없이 중형차를 예약했다. 하지만 경차를 추천한다. 더 비싸도 경차로 했어야만 했다. 프랑스의 골목, 주차장들은 어마어마하게 협소하다. 원래 중형차를 운전해 온 나였지만, 비좁은 주차장 입구를 들어서면서(특히 오래된 건물 주차장 입구) 몇 번씩이나 울고 싶던 순간이 있었다.
렌터카 여행 준비를 대강 마치고 숙소를 나왔다. 파리의 골목들은 다 다른 모양, 분위기다. 골목 어귀를 돌면 또 다른 재미들이 있다. 어느덧 마레지구로 흘러 들어갔다. 마레지구는 다양한 미술관, 카페, 편집샵이 즐비한 파리의 중심지다. 쇼윈도를 보다 홀린 듯이 SANDRO 가게에 들어섰다. "봉쥬르" 경쾌한 점원의 인사말을 듣고, 아직 영어로 인사를 하기는 쑥스러워서 목인사만 하고 옷을 둘러봤다. "혹시 한국에서 왔나요?"(네), "블랙핑크 제니가 여기에서 이 니트를 사서 입었더니 한동안 완판되었잖아요. 우리 매장이 이 브랜드의 최초 매장이에요". 오호라 어쩌다 보니 들어선 첫 옷 가게가 브랜드의 첫 매장이라니, 제니도 다녀갔다니. 이게 바로 예술과 패션의 도시 파리인가?
체크무늬 재킷이 하나 눈에 들어와서 잠시 보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다른 점원이 와서 "저는 그 재킷이 제일 좋아요. 빈티지스타일이라서. 특히 카라가 마음에 들어요. 원하면 입어봐요."라고 새침하게 말을 얹고 갔다(최초 매장이라더니 점원들의 영업력이 좋다). 빈티지는 평소에 잘 안 입는 스타일이다. 정확히는 대학생 때는 빈티지를 좋아했지만 변호사일을 하면서 내 옷장에서 빈티지는 사라지고 비즈니스룩이 그 자리를 메웠다. 슬쩍 가격표를 보니 꽤 비쌌다. 방금 렌터카 예약을 하면서 큰 소비를 한참이어서, 입어보면 마음이 생길까 그냥 입지 않고 나왔다.
하지만 이제 내 눈에는 지나가는 파리지앵들의 옷만 보였다. 특히 파리지앵들의 그 자유로운 무드가 빈티지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많은 파리 사람들이 온갖 귀여운 빈티지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이켜보니 그 재킷은 정말 파리지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 파리지앵 단발머리에도 어울릴 것임이 자명했다. 계속 눈앞에 재킷이 어른거렸다.
어느새 센강 다리까지 와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가 센강 위 다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 지나치기에는 그 풍경과 음악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봤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최대한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방금 전까지 골목 구경에, 사람 구경에 정신이 팔렸던 나는, 이제는 센강 위 이름 모를 다리 위에서 재즈 공연을 홀린 듯이 보고 있다. 그저 걸어 다녔을 뿐인데 이미 낭만 치사량이다. 파리는 발자국마다 낭만이 가득하다.
이 무렵 나는 '심지어 내일 남프랑스로 떠나는데, 빈티지 재킷과 함께면 더 즐겁지 않겠어?'라며 결국 마지막 합리화를 마쳤다. 여행 낭만이 프랑스를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키고 말았다. 곧장 근처 매장을 찾아가서 사버렸다. 낭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곧바로 재킷으로 갈아입고 나와 거리를 걸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낭만을 실현하고 싶었는데, 여행을 하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낭만들이 하나 둘 더 생겨난다. 이번 여행에서 돈을 아끼기는 글렀다는 아주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에는 이 낭만들을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