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새옹지마
미리 맞춰둔 알람은 필요가 없었다.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다들 잠들어 있는 도미토리를 조용히 나왔다. 겉옷은 전날 산 파리지앵 재킷을 택했다. 쌀쌀한 날씨에 딱이군. 사길 잘했다고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른 아침 리옹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기차에 타고 약 5시간 정도 가면 니스에 도착한다. 기차에서 남프랑스 가이드북과 지도를 보면서 렌터카 동선을 짰다. 남프랑스에는 정말 좋은 도시가 많아서 그중 16일 일정에 맞추어 추려내려니 한 세월이었다. 내 태블릿도 내 머리도 뜨끈뜨끈 과부하가 왔다. 5시간이 어느새 금방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착한 니스는 햇볕이 따가웠다. 따뜻할 것은 예상했지만 덥다! 파리의 쌀쌀한 날씨와 비교할 때 같은 나라가 맞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늦여름 같은 날씨. 아직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을 걷다 보니 금세 몸이 후끈후끈해졌다. 파리지앵 겉옷은 금세 벗어버렸다. 10월 중순 니스의 첫인상은, 쨍한 채도, 약간 따가운 햇살로 기억한다.
나의 니스 여행의 첫 행선지는 니스에서 50분 떨어진 오래된 중세마을 Peille다. 니스 여행에 좋은 위치는 아니지만, 이번 여행은 니스보다는 니스 근교를 보려 했던 것이니까, 그리고 렌터카여행이니까. 시내 밖에 어딘가 멀리 있는 숙소를 가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 비스무리한 걸 느꼈다.
렌터카를 픽업하러 가는 길, 변덕스럽게도 맑던 하늘에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렌터카를 픽업해 보니 한국에서 몰던 SUV보다 더 큰 사이즈에, 핸들은 더 묵직했다. 전방센서와 후방카메라도 없는 차였다. 뽑기 운이 좋지 않았다. 여행의 설렘과 낯선 차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초보운전처럼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Peille로 향하는 길은 흐리고 안개가 자욱했다. 시골 마을을 한 두 개 스쳐 지나가고 나니 곧 고불고불한 산길이 나왔다. 산길은 점점 좁아졌다. 어느새 가드레일도 사라지고 깎아내린 절벽을 곁에 두고 달렸다. 여기서 과속했다가는 까닥하다는 황천길이겠구먼. S로 계속 꺾어져 올라가는 도로 위를 조심조심 올라갔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드라이브 음악은 진작 꺼두었고, 풍경은 흰자로만 힐끔힐끔 보면서 갔다. 산길에 익숙한 다른 차들은 이 느릿느릿한 누가 봐도 초보운전 렌터카를 참지 못하고 빠르게 추월해 갔다.
니스에서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나자, 멀리 산중턱에 하나 둘 자리 잡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Peille 마을이다. 산 위에 구름이 앉아 있고, 그 구름 안에 나무색, 황토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주차를 마치고 나니 70분이 걸렸다. 내비게이션보다 20분이 더 걸렸다. 어찌 되었든 황천길은 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밀려왔다.
낑낑대며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마을 골목에 들어섰다. 숙소에 들어가자, 베란다로 보이는 산의 풍경, 주방 창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렌터카가 아니면 쉽게 얻을 수 없는 풍경이다. 아,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이 마을에 계속 있어야겠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일단 마을 식당 탐색 및 마을 구경을 위해서 숙소를 나섰다. 지도상 마을 식당은 딱 2개였는데, 비수기라서 그런지 마을 식당들은 모두 닫았다. 일단 발길이 가는 대로 걸었다. 마을 구경을 하면서 사람보다 길고양이를 더 많이 봤다. 여기 정말 깡촌이구만. 돌로 만들어진 이국적인 길들을 걷다 보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식사가 문제였다. 걷다 걷다가 이제 진짜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싶을 때 즈음 마을 안에 하나뿐인 편의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다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동네 주민들이 편의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작은 편의점 안에는 빵, 치즈, 와인, 레트로트까지 알차게 구비되어 있었다. 한참을 무엇을 해먹을지 고민을 하다가, 토마토 파스타 재료와 레드와인을 사서 나왔다. 혼자 흑백요리사 찍는 것처럼 흥이 나서 요리를 했다.
간단한 파스타에 와인을 마시면서 드라마를, 정확히는 요새 최애인,,, 강훈 배우님을 봤다. 파스타에 와인을 하니 (으아) 알딸딸하고 좋다.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지만, 딱히 크게 한 것도 없는 하루였지만, 이런 심심한 하루를 고독하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행은 내일의 내가 알차게 해낼 테니!
아침에 눈을 뜨자 전날 먹은 와인에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새벽에 계속 깬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무려 11시까지 누워있었다. 오늘은 모나코와 에즈를 가는 날이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모나코로 향했다. 모나코로 가는 길, 전날부터 내린 비로 인해 안개에 싸여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렌터카 여행은 운전보다도 주차가 문제다. 모나코를 한 바퀴 돌고도 주차장을 찾지 못했다. 선착장 쪽 주차장까지 흘러 흘러 와서 주차를 겨우 했다. 점심시간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어서 식사를 해야 했지만, 제 때 에즈에 가려면 모나코에서 시간을 더 쓸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우선 언덕 위 모나토 대공궁을 향해서 뛰었다.
금세 언덕 위의 모나코 대공궁까지 올랐다. 바다, 요트, 모나코의 전경을 둘러보면서, 나라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는 사실, 이 작은 나라에 있을 게 다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대공궁을 거쳐 둘레길을 걸으면서 바다를 구경을 했다. 끝없는 바다를 보면서 조급한 마음을 잠시 흘려보냈다.
어느덧 선착장에 다시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지중해로 연결되는 바다에 마음을 두는 것도 잠시, 몬테카를로 방면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자니 꽤 먼 거리여서 에즈에서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몰려왔다. 다시 차를 끌고 근처에 주차를 할 생각에 아득해졌다. 주차장을 찾아 헤매면서 몬테카를로와 카지노를 슬쩍 눈으로 보긴 했다는 점을 위안 삼아, 아쉽지만 모나코는 이쯤에서 접고(!) 바로 에즈로 향하기로 했다.
배고픔과 흐린 날씨에 나는 자츰 예민해지고 있었다. 어서 에즈에 가서 맛난 것을 먹을 생각 하나로 배고픔을 참고 에즈로 향했다. 날은 더 흐려졌다. 저 멀리 언덕 위의 에즈마을이 보였다. 주차를 마치고 에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랑비는 폭우로 변했다. 골목을 타고 위쪽에서부터 빗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왔다.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폭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점 안에 발이 묵여 있었다.
상점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치지 않았다. 홀로 비를 뚫고 식물원까지 올라갔다. 이럴 수가. 식물원이 폭우로 인해서 임시 휴업이라고 쓰여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나코에 더 있을 걸, 아니 에즈를 먼저 왔으면 폭우 전에 볼 수 있었을 텐데. 우산으로 가리지 못한 폭우에 이미 옷과 신발은 다 젖었다. 이런저런 아쉬움과 불만이 몰려왔다.
다시 마을 입구로 내려오면서 보니 그새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식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문이 연 식당은, 구글평점을 보고 나니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 지도상으로 에즈에서 20분 거리 즈음에 맛집으로 보이는 식당이 있어서 전화를 해보니 7시부터 저녁 장사를 한다고 한다. 아직 2시간 이상 시간이 뜨는데 어쩌나 고민하는 와중에, 저 멀리 짙은 안개가 보였다. Pielle로 향하는 벼랑이 맞닿은 산길에 안개가 끼면, 거기에 해까지 지면 위험하다. 에즈마을에서 저녁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예상대로 길 곳곳에 안개가 꽉 내려앉았고, 몇몇 길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제대로 된 식당이 없으니 근처에서 저녁거리라도 사갈까 생각했지만, 지체하다 혹시 해가 지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배고픔을 참고 쉼 없이 갔다. 다행히 벼랑이 닿아 있는 구불진 산길까지는 안개가 끼지 않았다. 숙소에는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모나코도 에즈도 제대로 뭐 하나 본 것 같지 않아 속상한 마음이 컸다.
어제 닫았던 마을 식당들은, 오늘도 모두 닫았다. 어제 남은 재료 그대로 파스타를 또 해 먹었다. 어제처럼 신나지 않았다. 이 산골짜기에 숙소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저녁식사 정도는 제대로 했겠지, 이렇게 날씨 때문에 이 숙소에 발이 묶이지는 않았겠지, 니스 시내였으면 적어도 맛있는 식사는 했을 텐데. 이런 후회가 몰려왔다. 폭우만큼이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던 하루였다. 그날 밤 속소에서 혼자 와인 한 병을 다 비웠고, 울적한 마음에 일기를 길게 쓰다가 어느새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다. 전날 악천후로 제대로 된 여행을 하지 못하고 이른 귀가를 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니스 시내를 보고 생폴드방스를 가기로 정한 날이었지만, 내가 이대로! 에즈를 제대로 못 보고 가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일단 에즈 식물원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열었다고 했다. 어제 못 간 에즈를, 어제 못 간 그 식당을 내가 오늘은 꼭 가고 만다. 생폴드방스는 저녁 전에만 도착하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오늘은 진짜 힘내서 여행을 해야지.
구름이 조금 끼긴 했지만 어제 보다는 맑은 날씨였다. 아침 9시 부지런히 짐을 챙기고 차로 산골짜기 마을을 나왔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가는 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오색의 빛깔이 번쩍였다. 분명 무지개다. 근처에 급히 차를 세웠다. 머리 위에 있던 무지개가 어느새 저 멀리 작게 보였다.
내가 본 무지개는 분명 굉장히 가깝고 컸는데, 언제 저기까지 도망갔지? 그게 아니라 그 무지개가 지금도 그대로라면 난 지금 무지개 안에 있는 걸까?
바로 무지개 사진을 찍어서 <바다와 양산> 연극 친구들 단톡방에 보냈다. 저, 무지개를 만났어요!
2화에서 적었듯이 나는 프랑스에 오기 직전 <바다와 양산>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이 연극에서 무지개는 클라이막스에 해당한다. 죽기 전 나오코가 요지에게 ‘나 지금 무지개 안에 서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나를 잊지 말아 달라'라고 말할 때마다 슬퍼서 목이 매였다. 무지개는 내가 맡았던 나오코, 혹은 나오코의 사랑을 의미한다. 나오코는 언제나 남편 요지의 곁에 가까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다.
이 여행에서 난 선명한 무지개를 만났다. 지금 내 곁에서 나오코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니스 시내였다면 어떻게 저렇게 선명한 무지개를 만났겠어? 지금까지 무지개를 알아보지 못한 건 어쩌면 나인가 봐. 그걸 알려주려고 나오코가 왔다 갔나 봐. 무지개를 보고 나니 전날 밤 ‘니스 시내에서 잘 걸’이라고 불평하던 마음이 어느새 싹 날아갔다.
무지개를 보고서 흥이 난 상태로 에즈 식물원으로 향했다. 에즈 식물원은 다행히도 문을 열었고, 작지만 알찼다. 전망은 대단했다. 본 적 없는 특이한 식물들을 홀린 듯 둘러보니 어느새 1시간이 지났다. 고지대에 놓인 한적한 식물원에서 탁 트인 바다를 내려보고 있으니 마음의 시원했다. 식물원에서 저 멀리 니스, 생장캅페라까지 해안이 보였다. 내가 앞으로 가게 될 해안길이구나. 나는 남프랑스 여행 내내 바다를 만났다. 바다는 고독한 렌터카 여행에서 내 곁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 있어 준 유일한 친구. 남프랑스 여행을 하고 난 후, 나는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식물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차를 타고 어제 가지 못한 그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는 11시 반쯤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 중턱에 있는 식당, 손님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막 오픈 준비 중이던 서버가 친절하게 맞이했다.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아 비가 내리는 걸 봤다.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곧 다시 폭우가 내렸다.
메뉴는 라비올리를 시켰다. 메뉴들이 참 많아서 뭘 먹을지 고민하니, 서버가 양갈비와 오리가슴살을 추천해 줬다. 나는 ‘진짜 프렌치’를 먹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지난 이틀 제대로 된 프렌치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루빨리 남프랑스의 프렌치를 먹고 싶었다. 그러면 소고기가 올라간 라비올리가 진짜 프렌치라면서 추천해 줬다. 그의 추천을 믿고 시켰다.
시간이 흐르고 12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비가 오는데도 이 외진 식당까지 오다니, 나름 맛집이 맞나 보구나. 라비올리가 나왔고, 서버는 먹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마치 소고기 장아찌 만두요리 같았던 라비올리. 내 입에 꽤 잘 맞았다. 그 사이에 비가 그치고 구름이 점차 사라지더니 쨍쨍한 해가 비쳤다. 지중해 날씨 참 변덕스럽다. 라비올리를 다 비울 때 즈음에는 비에 깨끗하게 씻긴 햇살이 창가로 들어왔다. 계산을 하려 하자 서버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줬다. 이건 뭐지, 이건 프랑스식 번호 따기인가? 아니면 단골 영업인가? 그게 뭐든, 기분은 굉장히x2 좋았다.
니스 해변으로 갔다. 원래 비가 올 줄 알고 샤갈 박물관을 가려했는데, 해가 뜬 것을 보고 나니 니스 해변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니스 시내 주차장을 검색하고 갔더니 만차. 그 옆의 주차장에 자리가 있어 보여서 갔더니 이럴 수가 입구가 살벌하게 좁다. 잘못하다가는 긁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났다.
들어가서 더 큰 문제는 주차장이다. 자리는 없고, 남은 자리는 양 옆이 굉장히 좁았다. 그리고 문제는 이 차는 후방 카메라가 없다. 그 좁은 칸에 넣기 위해서 내가 끙끙대고 있자, 반대편에 주차를 마치고 나를 눈여겨보던 중동 커플이 직접 주차를 해주었다. 주차하고 나니 ‘전기차 only’란다. 다시 자리를 빼고 몇 바퀴 주차장을 돈 후에야 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이 작은 주차장에 어찌나 알차게 다들 주차를 했던지. 주차장에 들어서서 주차 자리를 찾아다는데에만 거의 30분이 걸렸다. 렌터카 여행 내내 주차가 참 두려웠다.
니스 해변으로 나갔다. 끝없는 해변이 가히 장관이었다. 바다를 보면서 쭉 걷다 보니 어느새 구시가지에 이르렀다. 구시가지에서 젤라또도 먹고, 성당도 들어가보았다. 니스를 분명 8년 전 여름에 왔었는데, 바다도 구시가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익숙한 건 니스의 주황색, 노란색 색감. 성당에 들어갔을 때 잠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지만 그게 니스 성당이 맞는지는 의문이다. 8년 전 니스에 관한 정확한 기억은, 늦은 저녁 니스 해변 바닷가에서 유럽 여행 사이트에서 동행들을 만나 맥주 한 잔을 기울인 기억. 여행의 기억은 장소보다는 순간인 것 같다. 이번 여행에는 순간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남프랑스에서 내내 흐리다가 니스 해변에서는 햇살을 만났다. 이건 정말 다행이야. 오랜만의 햇살에 바다는 반짝이면서 부서졌다.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사이에서 10월 중순임에도 마치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었다. 반짝거리는 바다, 파도를 눈에 담고 있으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돗자리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한참을 니스 해변에 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 소란했던 마음을 바다에 씻어 내렸다. 니스 여행의 꽤 괜찮은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차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았다. 내가 가는 길은 다 여행이 될 거야. 이 여행에는 어떤 장애물이 없을 것 같은, 뭐든 다 즐거울 것만 같다는 낙관, 기대, 설렘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렌터카에는 많은 불편함이 있고, 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특히 날씨는 내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여행을 해내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에 좋은 곳에 있어도 불평이 많았던 것 때 같다.
내가 가는 길을 여행으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니스 여행. 그럼에도 니스는 나에게 무지개와 반짝이는 바다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 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Pielle의 산냄새와 비냄새, 에즈에서 내려다본 긴 해안, 니스의 부서지는 반짝이는 바다가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