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가는 과정
스무살 후반에 결혼을 하고, 두 달만에 생긴 첫째 아이를 이듬해에 낳았다. 아이가 생긴 뒤로 나는 내 이름 석자 대신 oo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남편과도 서로 이름을 부르던 사이에서, 어른들 앞에서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아, oo엄마, oo아빠로 부르게 되면서, 점차 나의 이름은 사라져갔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기르며, 육아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 회사로 부터도 멀어지게 되자, 더 이상 내 이름이 불릴 일도 없어졌다. 간간히 도착하는 신호위반 딱지에 적힌 내 이름 석자 외에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친해지게 된 아이 친구 엄마들끼리도 서로의 이름보다는 자연스럽게 'oo엄마'로 휴대폰 이름을 저장하게 되었으며,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이 친구 엄마의 이름을 어쩌다가 알게 될 때면, 그 이름 석자가 참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다가 남편이 실수로연애 때 부르듯이, 'oo아!'하고 나의 이름을 부를 때면, 참 묘하게도 몽글몽글한 낯간지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저 나의 이름일 뿐인데도.
프리다이빙을 배우면서 나는 'oo님'으로 불렸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oo님' 보다는 'oo씨'가 더 익숙했고, '님'은 여지껏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사실 처음부터 입에 붙지가 않았다. 물 속에서 다이빙을 할 때면, 내가 몇 살인지, 내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에 관하여 묻는 사람도 없었다. 최대한 오래 숨을 찾기 위해서는 심장 박동수를 낮춰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습 도중 필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했다. 수업 이후에도 다들 인사를 하고 헤어질 뿐,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함께 먹는 경우도 드물었다. 가끔 나누는 대화는 신상 캐묻기가 아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자세로 하강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오래 편하게 숨을 참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깊은 수심을 갈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노하우를 나누는 것이었다.
프리다이빙은 버디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다. 상대방이 다이빙을 할 때, 함께 물 속에 들어가 눈을 마주보며, 서로의 안전을 지켜주고 다이빙 이후, 물 밖에서 회복호흡을 할 때면, 혹시라도 다이버가 정신을 잃을 때를 대비해 상대방이 오케이를 외치기 전까지 상대의 팔목을 꼭 잡아 주어야 한다. ‘이토록 친밀한 관계’가 끝난 후, 샤워 후 열쇠를 반납하고 "수고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뒤로 한 채, 각자의 차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고 두 시간 남짓한 거리를 다시 운전해 돌아가곤 했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오직 서로의 이름 뿐. 나는 이 쏘쿨한 관계들이 정말 좋았다. 그 관계 없는 관계들 속에 진한 매력을 느꼈다. 나이도, 가족 관계도, 직업도, 그 어떤 것도 서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는 오로지, '프리다이빙' 하나였다. 어떤 이는 3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에서도 첫째 아이가 중1이나 된 두 아이의 엄마인 프리다이버가 여태 미혼인 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한 사람도 먼저 묻지 않았고, 상대방도 굳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 아닐까. 우리들 사이엔 '프리다이빙' 하나만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문화의 특성 때문인지 의도치 않게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요구한다. 지인과 결혼한 키가 훤칠한 미국 남자는 한국인들에게 키가 얼마나 되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키를 물어보는 이유가 의아했단다. 처음엔 자신에게 키를 묻는 이유가 자신에게 옷을 선물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키 큰 사람에게 키를 묻는 것은 칭찬이 섞인 인사 치레 정도인 것을 그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대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자의든 타의든 수없이 많은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특히, 아이를 통해 만난 아이 친구 엄마들과의 만남에서 반복되는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좋은 학원에 대한 정보와 아이의 성적과, 아이의 학교, 또 그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그 사이엔 '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은 홀로 자기 처신을 하기 시작했고, 아이를 통해서 얽혀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들은 점차 나에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 관계가 아이들로 인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의 아이는 나로 비롯된 것이 아닌 엄연히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이자, '타인'이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아이가 일구어낸 성취와 성과에는 실로 엄마인 나의 노력이 반은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나의 성취와 성과는 아니었다. 오랜 육아휴직 기간 동안 나 자신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으로만 존재해야 했고 '나'로 인정 받아야만 했다.
물공포만 극복할 정도로 2레벨 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생각했던 프리다이빙을 계속 하면서,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멋지게 잘 해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2레벨 이후, 다시 3레벨 자격증에 도전하고, 20미터까지 도달해야 하는 수심에서 매번 18미터에서 실패하고 돌아 올라오면서, 이를 극복하고 싶어졌다. 한동안 온 종일 머릿 속에 '프리다이빙'을 떠올리며, 집 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틈틈이 관련 프리다이빙 유투브와 프리다이빙 경기를 보면서 다이빙 풀에 나갈 수 없는 날이면 집에서 드라이 트레이닝을 했고, 눈을 감고 숨을 참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원하는 깊이에 도달해 갔고, 평생 찌지 않던 살이 2키로가 불어 났지만, 그 2키로가 순전히 하체 근육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랜만에 성취감으로 기뻤다. 나에게 집중할 것이 생기자 나는 오히려 아이들에 대한 집착 아닌 집착에서 서서히 벗어났고,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과의 관계는 틀어질 틈이 없어졌다. 아이들은 나의 방관으로 인한 늘어난 자유 속에서 더 숨을 쉬었고, 우려와는 달리 스스로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조금씩 더 깊은 수심을 달성할 때마다 가장 큰 응원자들이 되어주고 있다.
나는 이제 엄마나 아내가 아닌, 진짜 나의 이름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