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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Jul 28. 2022

분수껏 사는 삶

가훈 "수분지족(守分知足)"과 윤이나 사태 속 "신기독야(愼其獨也)


요즘은 가훈을 걸어 놓은 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 때 "하면 된다", "가화만사성" 같은 클리셰가 집집마다 거실 한 가운데에 걸려있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의 가훈은 '수분지족'이었다. 수분지족(守分知足) 곧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안다"는 것인데, 아버지께서 생전에 주신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형이 고등학생일 때 미술 수행과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붓글씨로 가훈을 한자로 쓴 다음, 목판에 이를 새겨 넣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훈으로 수분지족을 주셨고, 형의 작품은 제법 오랫동안 우리 집 벽에 걸려 있었다. 이 가훈이 혈기왕성한 어린 내 눈에는 탐탁지 않았다. 


'인생 한번 사는 데,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가훈 좀 내려주지 저게 뭐람.' 

볼 때마다 힘이 빠지는 그런 가훈이었다.


분수라는 게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이지도 않는다.

"지 분수를 알아야지." 

"분수껏 살아!" 등

 

홍세화의 에세이 "결"을 읽다가 새삼 수분지족 가훈이 겹쳤다. 홍세화는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한 모습은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나는 얼마나 많이 소유할 것인가' '나는 어느 집단에 속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일갈한다.


주식/부동산/코인 투자 열풍이 불과 얼마 전이고 이제 내리막을 점치는 이들이 많으나 어찌 될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듯하다. 나 역시 이 광풍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이 모습은 구성원들이 제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남들처럼 소유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릴 것 같은 절실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절실함 때문에 평소의 나 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고, 그 결과는 성공적 일수도 있으나 많은 경우 참담해진다.




최근 프로골퍼 윤이나의 오구 사태가 논란이다. 지난 6월 16일 충북 음성 레인보우힐스 CC에서 열린 한국 여자오픈 1라운드 15번 홀에서 버려져 있던 로스트볼을 자신의 공인 것처럼 플레이했다. 그리고 부정행위를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알렸기 때문이다. 규정상 남의 볼을 친 것, 즉 오구 플레이를 숨기면 최대 ‘영구 출전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을 수 있다. 윤이나는 2003년 생이다. 여자 선수 치고는 엄청난 드라이버 비거리로 갤러리들의 찬사를 받고 있어 스타성도 다분하다. 고등학생 골퍼가 앞으로 출전할 대회가 얼마나 많겠는가? 앞길이 창창한 골퍼의 선수생명이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위태롭게 되었다. 내가 친 공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는 않고, 로스트 볼이 대신 보였을 때, 마음이 동할 수는 있다. 나 역시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는 고백 못하겠다. 세상이 속아 줄 수도 있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짝퉁 명품 시계를 차고 다니며, 주위에서 좋은 시계 찬다고 부러워해도 스스로가 짝퉁인 것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용에 군자 "신기독야"가 나온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신중하고 조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남이 보지 않는다고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세상이 더욱 투명해지고 있다. 공정과 상식이 화두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스스로 삼가고 처신해야 한다는 "신독"의 가르침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가훈을 이해한다. 아버지 가르침은 부당함에 저항하지 말고 고개 처박고 조용히 살라는 주문이 아니었다. 분수도 모르고 날뛰지 말라는 애기도 아니었다. 수분지족 하는 삶을 살아야 나 자신이 고결할 수 있으며, 한 줌의 자유가 허락되는 것이라는 점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분에 넘치는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려다가는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신기독야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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